인간
하나의 몸은 다른 하나의 몸에 대해서 시작되고 끝난다. 심지어 빈 공간조차도 매우 미묘한 몸의 일종이다. - 장 뤽 낭시
코로나 19 확진자가 전체 인구의 반 가까이 되면서 비확진자가 따돌림을 당하는 현상이 생겼다고 한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확진자가 죄인 취급을 당했는데, 쪽수가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새들은 쉼 없이 지저귄다고 한다.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무리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죽음이니까.
스마트 폰의 카톡도 일종의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카톡’ ‘카톡’ 하며 무리 속에 있음을 알고 안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이 아닌 인간이다. 단순히 무리 속에 있다고 안심이 되지 않는 존재다.
인간은 ‘자의식’이 있다. 다른 동물들은 ‘나’라는 의식이 없다. 자의식이 있는 인간은 더 나은 자신을 꿈꾼다.
프랑스 철학자 낭시는 말한다. “하나의 몸은 다른 하나의 몸에 대해서 시작되고 끝난다. 심지어 빈 공간조차도 매우 미묘한 몸의 일종이다.”
자의식이 있는 인간은 남을 의식하고 남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창조해간다. 동물처럼 무리지어 다닌다고 해서 만족이 되지 않는다.
계속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공동체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무리의 숫자를 정상,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으려하는 것일까?
각자의 자의식이 존중받지 못한 결과다. 부모를 위시한 어른들의 말씀을 따르며 살다보니 ‘자의식 없이’ 무리 속에 있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의식이 없는 무리는 전체주의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각자의 자의식을 존중해주며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조직을 꿈꿔야 한다.
낭시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연인’으로 보았다. 연인들은 두 사람만 존재하는 세계를 이룬다.
서로를 극진히 존중하기에 그들은 미리 정해진 규범 없이도 하나의 몸처럼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언젠가는 이러한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원시인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한 사람은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한 사람을 위하여 작동되는 공동체였다. 지금도 지구상의 많은 소수민족들은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오늘 아침에 산에 갔다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나무 의자에 앉아 개도 옆에 올라오게 했다.
개는 흙 묻은 발로 의자 여기저기를 다녔다. 누군가가 앉을 의자,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는 무심결에 알 것이다. 자신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개와 그 사람 사이에 나쁜 기운이 들어찰 것이다.
그 공간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나쁜 기운도 들어찰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무, 풀, 하늘, 허공의 나쁜 기운도 들어차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의 몸만 자신으로 아는 무지. 그 망상으로 우리는 사는 게 힘들다. 우리 몸은 다른 몸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몸이 된다.
ㅅ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아이를 보았다.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엄마가 학교 안전지킴이 할아버지에게 크게 소리친다. “담임선생님 좀 오라고 해 주세요!”
담임선생님이 교문 밖에 까지 와서 아이를 데려가란 말인가? 아이는 배운다. 세상에 지켜야 할 규칙, 법이 없다는 것을.
엄마는 아이에게 무조건 학교에 가게 하려하지 말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야 보아야 한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학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렇게 키우면 나중에 아이는 부모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 아이는 스스로 삶을 꾸려가지 못하는 다 큰 아이가 되고 만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부분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사랑한 경험으로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