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를 위하여
타인의 자아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야 말로 실로 독서라고 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어제 공부모임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텍스트로 삼아 함께 토론을 했다. 학교 교사들이 많아 많은 분들이 주인공 뫼르소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대학에서 ‘이방인’을 강의하면 학생들은 뫼르소를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본다고 한다.
기성인들에게는 뫼르소가 반사회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20대 청년들에게는 반사회적인 인물이 아니라 ‘개성’이 뚜렷한 인간으로 보이는가 보다.
한 회원이 질문을 했다. “뫼르소가 실존주의적 인간이라는데, 그럼 요즘 아이들 같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 실존주의적인 인물과 같다는 건가요?”
나는 전혀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겉으로는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실존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실존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선택한다. 점점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도 읽게 되고, 그들과 연대하게 된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이러한 실존주의의 길을 가는 인간들을 잘 보여준다.
작은 도시에서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시민들이 당혹해하지만, 차츰 제 정신을 차리고 서로 연대하며 난관을 극복해간다.
그런데, 코로나 19가 창궐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보자. 그들은 코로나 19의 태풍 앞에서 자신들의 권익, 자유를 1순위에 두지 않는가?
그들은 실존주의적 인간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상이다.
물론 그들도 시간이 흐르며 전 인류적인 위기 앞에서 모두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갈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실존주의는 오랜 본질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본질주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질(質)이 정해져 있다는 사상이다.
왕족, 귀족, 평민, 노예...... .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따라 한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는 사상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꾸려 가는가? 많은 젊은이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매뉴얼대로 살아가지 않는가?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자아 중심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젊은 세대들은 자아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 자아는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자신의 자유를 가장 중시한다.
뫼르소는 자아 중심의 인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의 소리에 따라 이 세상의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법, 관습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고귀한 영혼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이기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중시하며 자신의 삶을 밀고 간다. 그는 세상과 부딪치며 정신이 점점 깊어진다.
그가 아랍인들을 살해했을 때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점만 본다면 그는 사회성이 없는 파렴치범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는 그가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우리는 실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에게 “왜 살인을 했느냐?”라고 묻는 건,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죽지 말고 살지” 라고 하는 말처럼 공허하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충동적인 존재다. 우리는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해 이성을 강요하며 개인에게 전적인 책임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영혼은 어찌나 까다롭고 유별난지
우리가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하찮은 이익을 위해 목숨 거는 우리들의 암투와
떠들썩한 음모는 영혼을 메스껍게 한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영혼에 관한 몇 마디> 부분
실존주의의 길을 가는 사람은 늘 ‘영혼에 관한 몇 마디’를 듣는다. 그들은 항상 삶에 대해 엄청난 고뇌를 한다.
그들이 반사회적으로 보이는 건, 사회가 반인간적이어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