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by 고석근

두려움


환희가 실제로는 우리가 전혀 피하지 않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어떤 두려움을 끝에서 끝까지 주파한다면, 그것이 바로 환희인 것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사랑의 상처가 두려워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으려는 청춘남녀, 드라마에 수없이 나온다.


아마 현실에서도 이런 청춘남녀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기에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한번 상처 받으면 회복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한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안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어도 좋은 것’이다. 왜? 후손을 남겼으니까. 내생의 할 일은 끝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명체들이 사랑을 나누고 사라진다. 인간은 사랑을 하고서도 오래 살아남는다.


하지만 자신을 불태우는 사랑을 하지 못한 사람의 여생은 쓸쓸하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는 말한다. ‘어떤 두려움을 끝에서 끝까지 주파한다면, 그것이 바로 환희인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가갈 때 도달하는 환희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이다.


정상에서 맞이하는 삶은 동시에 죽음이다. 절정의 생(生)과 사(死). 우주 만물의 이치는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아침에 먹은 것들이 새로운 세포로 만들어지는 동안에 다른 세포들은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게 아니다. 삶 자체가 삶과 죽음의 영원한 율동이다.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삶이다.

우리는 매순간 죽고 다시 태어난다. 영원한 죽음과 부활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1초전의 나가 아니다.


이러한 영원한 생명, 진리를 체험하는 순간이 바로 사랑의 순간이다. ‘사랑은 진리의 구현(알랭 바디우)’이다.

이러한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인생은 우울과 권태다. 그날이 그날인 나날을 견디지 못해 빠져드는 쾌락의 늪이다.


우리는 자신의 희열을 따라가야 한다. 안에서 솟아올라오는 희열을 따라가다 보면 신의 소리도 함께 듣게 된다.


그렇다고 항상 희열만 있는 게 아니다. 희열이 큰 만큼 고통도 크다. ‘주이상스’다. 고통과 희열의 이중주.


주이상스의 길을 따라가면 두려움은 점점 작아져 마침내 사라져버린다. 진정한 사랑을 피하는 청춘남녀들은 어떻게 될까?


두려움은 점점 커진다. 자신들은 점점 작아진다. 점점 남에게 의존하게 된다. 콩알만 해진 가슴으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도 무사히...... .’ 늘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기도하는 삶. 한평생 쫓기는 삶. 이런 삶을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처음부터 두려움에 맞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두려움이 큰 만큼 희열도 크다. 고통이 큰 만큼 희열도 크다.


극한의 희열, 환희는 두려움의 봉우리에 있다. 이때 우리는 ‘대자유(大自由)’를 느낀다.


천지자연의 조화 속에 있다. 찰나가 영원이 된다. 두려움에 맞서는 한걸음 한걸음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다.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기도> 부분



자신 안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기도하게 될 것이다.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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