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유감

by 고석근

공리주의 유감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미국의 철학자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를 생각해 본다. 그는 여러 예를 들며 공리주의를 옹호한다.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가 동생 알료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이 영원히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상상해봐. 세상의 모든 전쟁과 살육이 완전히 멈추는 거지. 그 대신 죄 없는 한 아이를 고문해야 돼. 그러면 넌 아이를 고문할 수 있어?”


알료사는 대답한다. “세계 평화를 위해 아이를 고문할 순 없다.”


피터 싱어는 반론을 편다.


“하지만 진짜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수백만 명을 구할 수 있고 끝없는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 아이를 고문하라고 할 것이다.”


피터 싱어의 생각이 끔찍하다. 그렇게 한 아이를 고문하여 얻는 세계의 평화, 그게 가능한가?


고문한 사람은 평화롭게 잘 살아갈까? 세상 사람이 한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고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들은 언제 자신들도 어떤 비상상황에서 그런 희생양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평화로운 마음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봉건제 사회에서 여자를 희생하고서 남자들은 겉으로는 호강을 누렸다. 하지만 남자들끼리 정말 잘 살아갔는가?


항상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아니었던가? 예수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구한 것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이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나머지 양들에게 “길 잃은 양 한 마리는 애초에 없었다고 치자. 한 마리 정도 없으면 어때? 우리끼리 잘 살 수 있잖아.”


나머지 양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하루하루 잘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평화(平和)는 글자 그대로 ‘입에 들어가는 쌀(和)’이 공평(平)한 것을 말한다. 한 사람에게 쌀을 주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준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 갈 수 있을까?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욕구가 있다. 생존의 욕구와 자기 초월의 욕구가 그것이다.”


피터 싱어의 말대로 하면, 인간의 생존의 욕구는 만족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 초월의 욕구는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지키려는 숭고한 가치가 있다. 현대의 물질을 숭배하는 세상이 우리에게 생존의 욕구만 부추기지만, 자기초월의 욕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당당하지 못한 행동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다. 인간이 수치심을 안고서 행복할 수 있을까?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인간성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피터 싱어는 또 다른 예를 든다.


“당신이 무너진 건물 안에 갇혀있고, 콘크리트 덩어리가 딸에게 떨어지려 한다.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을 잃은 다른 사람의 다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딸을 구하기 위해 타인의 다리를 이용해도 될까?”


그는 주장한다. “이용해도 된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렇게 행동할 부모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이런 주제들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토론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피터 싱어는 왜 ‘건물 붕괴’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가? 부실 공사로 붕괴되는 건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중요한 문제는 제쳐두고 어떤 위급한 상황 설정에 주력하게 되면, 그런 상황을 오게 한 사회적 요인들은 묻혀버린다.


그는 또 ‘의사의 딜레마’를 예로 든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어느 중환자실에 누구를 입원시켜야 할까? 일반적 상황에서는 먼저 오는 사람이 먼저 입원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중환자실 침대를 사용한다면 나중에 온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은 사람이 치료를 못 받는 게 아닌가?”


이런 비상상황에서는 비상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왜 애초에 이런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 의료체계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가?


공공의료를 잘 확충해 놓았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피터 싱어가 어떤 특수한 상황을 예로 드는 것이 결국엔 그런 특수한 상황을 당연시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정녕 모르는 건가?


우리는 인간의 초심, 태초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하면서 ‘공감’이라는 게 생겨났다.


그래서 위급한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런 고귀한 마음은 도외시하고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라는 관점으로 한 사람의 희생을 바라보게 되면, 인간 전체가 비참해진다.


피터 싱어는 인간의 행복을 ‘쾌락’으로 본다. 쾌락은 밖에서 주어지는 자극이다. 인간의 행복에는 쾌락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희열(Bliss)도 있다.


왜 인간의 모든 행복을 쾌락으로 한정해 버리는가?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심신이 지친 사람이 쾌락을 찾는다. 현대인들은 항상 지쳐있어,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찾는다.


그래서 피터 싱어의 이론이 언뜻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왜 현대인은 항상 지쳐있어야 하는가? 그에게는 이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없다.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는 물질을 숭배하는 세상, 그래서 항상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맞는 철학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초월의 욕구가 있어 묻는다. 우리는 왜 이런 세상에서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어야 하지 않는가?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가 인간 세상의 보편적 이론처럼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의 철학은 현대사회의 어떤 아주 좁은 영역에서만 유효할 것이다. 나머지 거대한 영역에 우리는 철학적 사유의 빛을 비춰야 한다.



산과 바다와 사막을 걸으라

걸어다닐 시간이 있으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라

춤 출 시간이 있으면

조용히 앉으라

이 행복한 바보여


- 나나오 사카키, <행복한 바보> 부분



고대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내게 보리떡 하나와 물 한 잔을 주면 제우스신과 행복을 다투리라.”


그는 쾌락을 추구하다, 끝내 평정심(아타락시아)에 도달했다. 그는 이것을 최고의 선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현대인은 이런 경지로 올라가지 못하는 걸까? 물질주의 사회가 계속 우리의 물욕을 부추기기 때문일 것이다.


공리주의는 이런 현실을 긍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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