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by 고석근

동물원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탈리아의 작가 브루노 무나리의 그림책 ‘동물원’은 ‘아이의 눈’으로 동물들을 보게 한다.


‘앵무새는 무지개가 뜬 날에 태어났어요.’


‘비가 오면 새들은 코끼리 배 밑에서 비를 피해요.’


‘플라밍고들은 자기들이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걸 잘 알아요. 놀 때도 대칭을 이루고 놀지요.’


‘얼룩말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었어요.’


‘사자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지요.’


‘다람쥐는 여름 내내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모아요.’


‘코뿔소는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뱀은 자기 몸을 묶었다 풀었다 해요.’


‘여우는 모피 장사꾼을 보면 얼른 피해요.’


‘새들은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요.’


‘어떤 낙타는 혹이 두 개예요. 와, 우리가 앉을 자리가 있네요.’


‘물개는 묘기 부리는 걸 좋아해요.’


‘원숭이들은 손을 발처럼, 발을 손처럼 사용해요.’


...... .


어른들은 동물들을 보면 이름으로 본다. ‘저건 앵무새, 저건 다람쥐, 저건 원숭이...... .’


고대의 현자 노자는 말했다.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어떤 대상을 이름으로 부르면, 그 이름은 어떤 대상의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는 것이다.


앵무새를 보고 앵무새라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앵무새를 보고 우리가 직감적으로 느꼈던 앵무새에 대한 모든 느낌들은 사라지고 만다.


우리의 모든 느낌은 이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동물들을 보고도 감탄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동물들을 보아도 동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단지 이름의 껍질을 쓴 동물들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의 이름은 명사이니 동물은 움직이지 않는 사물이 된다. 딱딱하게 굳은 세상, 어른이 보는 세상이다.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 눈에는 삼라만상은 천변만화하고 있다. 잠시라도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 약동하고 있다. 아이의 눈에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하자 라캉이 말하는 동물들의 ‘실재계(實在界)’가 펼쳐진다.


그래서 아이들은 항상 즐겁다. 천지자연의 조화와 함께 춤을 춘다. 매순간이 천지창조다.


원시인들도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인디언들의 이름은 천지자연과 함께 약동한다.


‘늑대와 함께 춤을’ ‘주먹 쥐고 일어서’ 삼라만상은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보는 매순간이 생성 변화하는 찰나다.


그들의 이름에서 우리는 찰나를 본다. 눈부시게 빛나는 한 순간을. 그 찰나는 영원한 현재다.


아이의 눈으로 본 동물원의 시간은 어른들이 본, 마냥 지루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매순간, 분수처럼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시간의 폭발이다.



1

꽃이 피거나

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

본성이 아닌거야

검은 흙 속을

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온 시간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풀려지는 일이야


〔......〕


2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봐, 저 들판, 저 강가, 네가 발 딛고 선 이 땅 속 어디에든 바람이 숨겨 둔 풀씨들이 발꼬락을 움직여 무엇으로 일어서려 하는지. 한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날개의 길이로, 그 불균형으로 바람을 타고 올랐을 것이고, 혹은 가능한 멀리로 자신을 뱉아내는 그 모든 세상에서 밀려 나 아주 쓸쓸한 저녁을 맞았을지도 모르지. 잘 보면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분명히 보일거야, 바로 네가 발 딛고 선 그 자리일지도 몰라. 네가 가둔 것들, 네가 끝끝내 손에 쥔 그것들을 한번쯤 놓아봐.


- 이승희, <씨앗> 부분



시인은 노래한다. ‘네가 가둔 것들, 네가 끝끝내 손에 쥔 그것들을 한번쯤 놓아봐.’


그러면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묻어 둔 온갖 씨앗들이 싹을 틔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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