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우리의 가장 어두운 슬픔 속에 우리의 가장 밝은 희망이 있다. - 아서 트레스
벨기에 작가 안 에르보의 그림책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주인공 브루는 슬픔을 안고 길을 간다.
‘브루는 슬퍼요. 고양이가 사라졌거든요.’
브루가 카우보이 앞을 지나가는데 아저씨가 물어요.
“얼굴이 왜 그러냐?”
“고양이가 사라졌어요.”
“아, 나보단 낫네. 나는 모자랑 열쇠 꾸러미랑 말이 다 사라졌다고!”
브루는 계속 가요.
가던 길에 까마귀 아주머니를 만나요.
“에구구, 겨우 그깟 걸 가지고 난리니?”
“난 코가 깨진데다 발에는 자갈이 박혔다고!”
브루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슬픔이 하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슬픔이 한 짐이다. 슬픔에는 ‘작다- 크다’가 없다. 슬픔을 지고 가는 건, 누구나 견디기 힘들다.
슬픔을 지고 가다,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슬픔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눈에 안보일 뿐이다.
슬픔은 똬리를 튼다. 하시라도 밖으로 나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우리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혹은 슬픔이 불로 화하여 화산처럼 폭발하게 된다. 그러다 슬픔을 더 마음 깊이 감추게 된다.
우리는 서서히 시들어간다. 세상은 잿빛이 된다. 우리의 발걸음은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간다.
‘북극에 사는 아이가 브루를 바라봐요.
브루는 어깨를 오그려요. 엄청나게 추워요.’
‘그때 개 한 마리가 다가와요.’
“왜 그렇게 슬퍼하니?” 개가 물어요.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개가 다시 물어요.
“사실은 슬퍼. 고양이가 사라졌거든.
길 고양이라 길들여지진 않았지만
내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오곤 했는데... .”
“응, 그랬구나.” 개가 말해요.
“하지만 세상에는 훨씬 더 슬픈 일들이 많아.” 브루가 말해요.
“그거야 그렇겠지. 그래도 네 고양이에 대해 얘기해 줘.
그럼 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널리 퍼져 나갈 거야.”
‘브루는 고양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요.’
이제 브루는 슬픔의 짐을 많이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 짐을 우리 모두 나누어가지게 되었으니까.
브루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나누어갖게 될 것이다. 이것을 고대의 현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했다.
카타르시스는 정화(淨化)다. 우리의 마음이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맑디맑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갖 희로애락을 겪는다. 마음에 수많은 상흔이 생기게 된다. 마음이 혼탁해진다.
다시 맑게 해야 한다. 신화가 생겨난 이유다. 신화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시시대에는 모든 게 신이니 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현대 문명인들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머리 위에 항상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다.
우리의 슬픔을 마음껏 이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들 자신들의 슬픔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다.
잎새며 가지들 가득
내 몸을 감싸다오
내 가슴 깊은 데 살랑이는
그대 슬픔이 내 울음이 되도록
- 데이비드 매켄, <나무가 바람에게> 부분
시인은 ‘나무가 바람에게’ 하는 말을 듣는다. ‘내 가슴 깊은 데 살랑이는/ 그대 슬픔이 내 울음이 되도록’
천지자연은 언제나 서로의 슬픔을 나누며 함께 견딜 것이다. 그래서 언제 봐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