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다. - 화엄경
어릴 적 학교를 다녀오면 책보를 마루에 집어던지고 채소밭으로 갔다. 읍내를 바라보며 해가 질 때까지 일했다.
어둑해서야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읍내를 비추던 커다란 마음속의 거울이 그제야 사라졌다.
거울이 없는 세상은 참으로 좋았다. 밥을 먹고 골목에 나가면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서로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니 거리낌 없이 즐거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늘의 커다란 거울이 눈부셨다. 우리는 환하게 보이는 서로의 모습에 눈을 찡그리며 학교로 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밖으로 나가자 눈이 부셨다. 높다란 건물들과 줄달음치는 차들, 거리가 휘황하게 빛났다.
우뚝 서서 남대문을 바라보았다. ‘아, 서울이구나!’ 나와 서울은 서로를 번쩍이며 비췄다. 떠나온 고향 상주는 우중충한 시골이 되었다.
내 마음속의 거울은 상주에서 서울로 교체되었다. 그 후 서울을 중심으로 맴돌며 살았다.
30대 중반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기우뚱했다. ‘오! 거울 속이었구나!’ 세상이 미끄러웠다.
보르헤스의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테르티우스’에는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고향의 채소밭에서 바라본 읍내, 아지랑이가 피어올라가는 거울 속이었다. 나와 거울은 서로를 비추며 나를 계속 증식시켰다.
헛것이었다. 나의 삶 전체가 거울 속 세상이었다. ‘거울에서 빠져나가야 해!’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거울 속이었다.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울부짖었다. 들판을 달리며 꺽꺽 울었다.
보르헤스는 또한 말했다. “눈이 핑핑 도는 성교의 순간에 있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사람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암송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거울과 성교가 사람의 수를 무수히 증식시키기에 가증스러운 것 같지만, 실은 증식된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사람들이기에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흡사 천 개의 강에 비친 달과 같다.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 한 개인 것이다. 강물에 비친 달은 헛것인 것이다.
보르헤스는 내게 말한다. “네가 바로 그 한 사람이다.” 이어 그는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 한 사람이다.”
내가 나중에 죽는다 해도 그건 거울에 비친, 그 한 사람의 허상이리라. 그 한 사람은 우리의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니까.
세월과 물로 된 강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시간은 또 다른 강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강물처럼 사라져갈 것을 알며
얼굴들 또한 강물처럼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눈을 뜨고 본다는 것도 또 하나의 꿈임을 느끼며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꿈꾸는 꿈,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밤마다 꿈이라고 부르는
그런 죽음밖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며
하루의 한 해 속에 사람의 나이와 세월들의
상징을 읽으며, 세월이 앗아간 인생의 아픔을
음악으로, 소음으로, 상징으로 바꾸어가는 일.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학> 부분
시인의 생각이 성철 선사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성철 선사의 말은 또한 중국의 어느 선사의 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