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진리는 학설도 지식도 아니다. 도(道)이며 생명이다. - C. 힐티
그저께 강의 시간에 한 회원이 자신은 진화론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 예로 ‘개냥이’가 되어가는 고양이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고양이는 야생성을 지니고 있어 개처럼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고양이도 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개양이로 진화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유전자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길들여진 개도 개 스스로 진화한 결과다. 사람을 종처럼 부리고 있으니 개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은가?
편하게 산다는 관점에서 보면 ‘개팔자’보다 좋은 사람팔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일하지 않고 사람을 부리고 사는 인간이야말로 아주 우수하게 진화한 인간이다.
그래서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하게 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유태인을 학살하는 게 옳은 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진화론이 맞을까? 진리일까?’하는 질문에 대해 ‘왜 그런 질문을 하지?’하고 질문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위스의 작가 C. 힐티는 말했다. “진리는 학설도 지식도 아니다. 도(道)이며 생명이다.”
학설, 지식이 진리가 되어버리면 무서운 폭력이 된다. 폭력을 쓴다고 생각하고 폭력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리가 도이며 생명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무한히 겸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언어로는 도와 생명을 말할 수 없으니까.
니체는 ‘힘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해석법을 가져라’고 말한다. 진화론을 믿고 있으면 힘의 의지가 고양되는 사람은 진화론을 믿으면 될 것이다.
나는 진화론을 생각만 해도 힘이 빠진다. 그래서 나는 진화론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화론을 믿으면 내 생명의 주인은 나의 유전자가 된다. 진화론은 나의 행동의 합리화가 되기가 쉽다.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진화론을 믿으며 안심할 것이다. 노예의 삶이야 말로 얼마나 편안한가!
그냥 남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삶은 편안하다. 혼나면 혼이 나가면 되고 때리면 맞으면 된다.
고난을 참고 견디면 행복한 날이 오게 되어 있다. 시간은 노예의 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인의 삶을 포기한다.
노예로 살아가면 부끄러움이 느껴질 텐데, 유전자의 선택이라니 얼마나 좋은 구실인가?
한때 진화론이 진리처럼 떠 받들어지던 때가 있었다. 그때 일제강점기를 비굴하게 살아가던 친일파들에겐 복음이 아니었을까?
앞서 간 일본을 따라가야 해! 내게 비록 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역사가 알아줄 거야!
그는 열심히 당당하게 친일을 했을 것이다. 독립군을 마음 편하게 고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화론에 대해서는 어느 측면에서는 맞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심히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판을 향해 ---- 떠나가며 ----
거대한 오후 ----
장엄한 구름은 문지기처럼 ---- 만물에
기대어 ---- 바라보고 있었네 ----
〔......〕
이윽고 홀로.... 영혼만 남았네....
- 에밀리 디킨슨, <심판을 향해 떠나가며> 부분
시인은 ‘심판을 향해 떠나가며’ ‘이윽고 홀로.... 영혼만 남았네....’하고 노래한다.
아마 시인처럼 삶을 치열하게 산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며 누구나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치열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온갖 ‘진리’를 갈구할 것이다. 무언가에 자신을 의탁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