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부동(和而不同)
사람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로서만 측정될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화이부동, 남과 화목(和睦)하게 지내지만 자신의 중심(中心)과 원칙(原則)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동(同)은 모두가 똑같음을 요구한다.
군자는 불교의 ‘보살’과 같다. 인도에서는 오랫동안 해탈한 성자들은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철기문명이 도래하면서 인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해탈한 성자가 중생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불교가 등장하고 불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였다. 이제 수도승들은 해탈만을 목표로 하지 않게 되었다.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두게 되었다.
이런 사람이 보살이다. 유교의 군자다. 군자는 출세(出世)가 목표다. 공부해서 남에게 주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군자의 길은 중용(中庸)의 도다. 중(中)은 마음의 중심이다. 융이 말하는 자기(自己 self)다.
자기는 자아(自我 ego)와 다르다. 자기는 전체 마음의 중심이고,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다.
우리의 마음은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눠진다. 의식은 자신이 아는 마음이다.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크다.
인간의 진짜 마음은 무의식에 있다. 자신도 모르는 마음이다. 깊은 명상 속에서 어렴풋이 예감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무의식에 깊이 자라잡고 있는 자기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말하는 ‘해방된 마음’이다.
자아에서 해방된 마음, 우주와 하나로 통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의 중심(中)을 항상 잃지 않고 ‘일상의 삶의 살아가는(庸)’ 사람이 바로 군자다.
중심의 마음은 우주와 통하니 당연히 모든 사람의 마음과도 통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낸다.
반면에 소인, 자아에 갇혀 자신만 아는 사람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고 서로 똑 같아진다.
소인의 마음의 중심은 자아에 있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니, 소인은 깊은 무의식의 자기가 말하는 것은 듣지도 못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자아는 오로지 자신만 안다. 자신의 이익이 최고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항상 이익의 관점에서 대한다.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으니 다른 사람과 공감하지도 못한다. 이익으로만 뭉치니 서로 똑 같아진다.
이익이 어긋나면 사정없이 갈라진다. 이익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 이익이 서로 맞는 사람들끼리 하나로 똘똘 뭉친다.
그들은 겉으로는 웃지만 옷소매엔 항상 비수를 숨겨 놓고 있다.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
군자는 항상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 그의 마음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깨어난다.
소인의 깊은 내면에도 인의예지가 있으나, 항상 자신의 이익을 탐하기에 깨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안에
뜨거운 중심을 가지고 있다
한 마리 벌이나 개미인들 중심 없으랴
먼지들도 한 중심으로 뭉쳐서 날아다님을
- 이대흠, <뜨거운 중심> 부분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안에/ 뜨거운 중심을 가지고 있다’
그 중심은 자신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중심이다.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의 주변에 속하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