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용(無用之用)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이다. 고통의 숨결 아래서 인간은 성장한다. - M. 에센바흐
일본의 동화작가 구도 나오코의 그림책 ‘작은 배추’를 공부 모임에서 함께 읽었다.
언덕 위에 오도카니 선 감나무가 옆에 있는 밭을 보고 말했습니다.
“흠, 올해는 배추를 심었구나.”
여기서 지낸 지도 벌써 여러 해, 웬만한 채소는 모르는 게 없는 감나무입니다.
어느 날, 감나무 밑에서 누군가 말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감나무가 내려다보니, 바람에 날려 왔는지 배추 떡잎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습니다.
“배추란다, 꼬마배추.” 감나무가 말했습니다.
“아, 안녕! 그런데 넌 누구야?”
배추는 감나무에게 이것저것 배우면서 조금씩 자랐습니다. 작은 배추는 속잎이 자라나면서 어느덧 동그랗게 알이 찼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올 무렵, 트럭이 나타나서 밭에 있는 배추를 실었습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거지?”
“채소 가게로 가지.”
감나무가 가르쳐주었습니다.
작은 배추도 따라가고 싶어서 트럭 아저씨에게 “저요, 저요!”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배추는 태워주지 않았습니다.
땅이 단단해질 만큼 추워졌습니다. 밭에 남은 배추들은 지푸라기 머리띠를 묶었습니다.
작은 배추도 작은 머리띠를 묶었습니다.
트럭이 왔습니다. 트럭 아저씨가 작은 배추를 톡톡 토닥였습니다. “좀 작은가? 그래 넌 여기서 봄을 기다렸다가 꽃을 피워 나비랑 놀려무나.”
펑펑 눈 내리는 밤과 얼음장 같은 아침이 지나가고 봄이 왔습니다.
작은 배추 머리 위로 쑥 뻗어 나온 줄기 끝에 샛노란 꽃이 왕관처럼 피었습니다. 나비가 하나둘 날아와서 인사했습니다.
장자의 ‘무용지용’이 생각난다. 장자가 제자들과 산길을 가다 오래된 굽은 나무를 보았다.
제자들이 장자에게 “저 나무는 쓸모가 없군요.”라고 하자, 장자는 말했다. “쓸모가 없어 천수를 누리지 않느냐?”
작은 배추도 시장에 내다 팔 만한 가치가 없어, 천수를 다하며 꽃을 활짝 피우지 않는가?
인간에게는 크게 두 가지 욕구가 있다. 생존의 욕구와 자기초월의 욕구다. 생존의 욕구는 세상이 알아줘야 달성하기가 쉽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세상에서 존재감이 있고, 더 나은 자기를 계발해가는 것. 이런 것들은 세상의 인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자기초월의 욕구는 이 모든 것들은 깡그리 무시한다. 고갱은 자신이 가진 직장, 지위, 재산, 가정...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타히티 섬으로 훌훌 떠났다.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는 고갱의 마음이 있다. 이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사는 게 허망하다.
우리는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돈, 권력 명예를 다 갖고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인간에게는 몸과 함께 영혼이 있어, 영혼이 깨어나지 않으면 온전한 삶이 아닌 것이다.
이 영혼이 깨어나려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야 한다.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져야 한다.
육체가 약해진 만큼 영혼이 깨어난다. 우리는 세상이 인정해줄 때는 생존의 욕구를 누리고, 인정을 받지 못할 때는 영혼을 깨워야 한다.
따라서 크게 보면 인생은 좋은 때도 나쁜 때도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대로 ‘꽃으로 장엄한, 화엄(華嚴)의 세계’라고 한다.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씨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 쓰게 한다.
그러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냉랭한 매혹에게 운명을 걸었다.
나를 악착같이 포옹해내려는 집 밖에는 보름달이 떠있다.
온 우주의 문밖에서 난 유일하게 달과 마주한다.
유목민인 달의 얼굴에 난 내 운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만
달은 그저 냉랭한 매혹만을 보여줄 뿐이다.
- 유하, <달의 몰락> 부분
쓸모있음만 찬양하는 현대사회에서 시인은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온 우주의 문밖에서 난 유일하게 달과 마주한다.’
시인은 예감한다. ‘내 노래도 달과 더불어 몰락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