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망회회(天網恢恢)
진실을 땅에 파묻으면 나중에 크게 폭발한다. - 에밀 졸라
1961년 4월, 이스라엘의 한 법정에서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그는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였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잠적했지만,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독일계 정치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미국 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게 되었다.
아렌트의 연재 기사의 제목은 ‘전반적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 이 글은 2년 뒤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덧붙여져 도서로 발간되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성인 남성처럼 보였다. 이웃과 가족에게 친절했으며, 정신 또한 지극힌 정상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말했다. “나는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는 오직 국가적 공식 행위였고, 자신은 열심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한 것뿐이기에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유대인 학살 행위가 ‘출세욕’이라는 관료로서의 너무나 평범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렌트는 말했다. “악이란 특별히 악한 존재 혹은 악한 무언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무사유’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나도 10여년을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악의 평범성’을 실감했다. 피라미드 조직의 한 부품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할 수 있는가?
TV 드라마 ‘모범형사2’를 보며 생각한다. 피라미드의 경찰조직 속에서 일개 형사가 ‘사유’를 할 수 있는가?
인삼절도범을 잡기 위해 잠복 수사를 하던 인천의 모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이 연쇄살인범을 체포하게 된다.
하지만 단순한 인삼절도범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풀어준다. 서울 경찰청의 광역수사대가 출동하고 인천의 형사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인천의 형사들은 그 연쇄살인범을 쫓다가 그를 차에 치어 죽게 한다. 언론에서는 연쇄살인범 체포라고 대서특필하고 경찰서장도 형사들을 극찬한다.
하지만 두 형사는 안다. 그가 단순한 좀도둑임을. 두 형사의 양심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연쇄살인범이 아님이 밝혀지면, 경찰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많은 경찰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래서 ‘조직’은 그를 연쇄살인범으로 결론을 짓고 싶어 할 것이다. 많은 경찰들이 여기에 동조할 것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큰 압력 속에서 두 형사는 양심의 소리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두 형사는 또 다른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속한 조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가? 우리의 상관, 동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가?’
인간에게 양심은 두 개다. 하나는 하늘이 준 양심이다. 하나는 태어난 이후 세상이 심어준 양심,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super-ego)다.
이 두 양심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늘이 준 양심, 본성(本性)이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이다.
‘하늘에 쳐져있는 그물은 넓고 커서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하늘이 준 양심의 소리에 지옥을 체험했을 것이다. 아마 두 형사는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멋진 활약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우리의 꿈을 읽는다. 현실에서 그런 멋진 사법기관의 관료를 고대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거짓말을 너무 좋아해,
저 사람과는 결별해야겠어,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수많은 거짓말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
저 사람은 너무 이해심이 없어,
그러니까 저 사람과는 작별해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하며
모두 내 마음에서 떠나 보냈는데
이젠 이곳에 나 홀로 남았네.
- 김남기, <그때 왜> 부분
우리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세상이 온통 진흙투성이니, 우리는 진흙을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 모두 진흙투성이 몸으로 함께 연꽃을 피워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