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기복례(克己復禮)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한번 진리를 인정해버리고 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 알베르 카뮈
안회가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대답했다. “자기 사욕(私慾)을 이겨내고 본연의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극기복례인 克己復禮爲仁.”
인간에게는 ‘사욕’이 있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챙기는 욕심. ‘자아’가 있어서 그렇다.
동물은 자아가 없다. 동물은 ‘나라는 의식’이 없기에, 본능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크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수백만 마리의 초식동물을 죽이는 맹수는 없다. 배가 채워지면 그만 죽인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는 언제나 평화롭다.
문제는 인간의 자아다. 생각하는 인간에게 자아가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다. 한 사람이 수백만 명을 학살한다.
이제는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죽일 수도 있다. 이 자아를 제어하지 못하면,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공자는 인간 세상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인에 둔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아를 극복해야 한다. 자아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남들과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규범’을 지켜야 한다.
사회 규범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도덕, 관습, 법률’의 총칭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사회규범을 잘 지키자는 율법주의자들이 많은 성현(聖賢)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예수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소크라테스도 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군들은 법의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법대로!’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최강의 무기다.
현대 철학의 문을 연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엄밀한 도덕 이론을 신봉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의 도덕적인 약점은 너그럽게 봐준다. 그런데 자유정신을 지닌 모랄리스트의 삶은 현미경으로 살피듯 감시한다.”
이 현미경에 걸려드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선구자들이다. 왜 대중은 도덕의 기준을 사람마다 다르게 들이댈까?
일반적인 대중은 도덕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안전, 안정’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긴다.
자신의 자리에서 편히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를 지켜주는 도덕이 무너지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대중들은 ‘엄밀한 도덕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 문화를 이루고 살아가기에 변화하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핍박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법을 깨는 게 아니라 세우러 왔다.”
그렇다. 법, 도덕은 계속 새로 세워야 한다. 특히 현대처럼 눈부시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사이비 종교의 특징이 경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 일점일획도 바뀌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눈부시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 않고 싶은 것이다. 변치 않는 것, 그 것은 죽음뿐이다.
법대로 하자는 사람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표정은 시체 같고 마음은 돌덩이 같다.
인간은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가야 하는 존재다. 대중은 이들을 무서워한다.
자신들의 자그마한 성(城)이 무너져 버릴까봐. 그래서 남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불 같이 화를 낸다. 마치 도덕의 수호자인양.
하지만 진정한 도덕의 수호자들은 ‘자유정신을 지닌 모랄리스트들’이다. 자유정신, 자아에 매이지 않고, 항상 자신을 발명하는 사람, 그는 저절로 도덕주의자가 된다.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물 같이 흘러 남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흘러가니까.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집의 가장(家長)은 절망이었다
절망이 술을 마시러 간 사이
그 틈을 우리는 희망이라 불렀다
〔......〕
행상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저녁을 지을 무렵
술 취한 절망이 돌아오면 희망은
깨지는 사기그릇의 비명소리에 놀라 달아나고
폭력과 울부짖음과 이유 없는 살기만이
유년(幼年), 우리들의 스케치북에
꽃 피지 않는 봄 풍경을 새겨넣었다
- 배정원, <삽화 78> 부분
시인은 모든 우리집을 대표하여 슬프게 노래한다. ‘우리집의 가장(家長)은 절망이었다’
왜 모든 가장들은 절망이었을까? 그들은 ‘엄밀한 도덕 이론의 신봉자들’이어서 그렇다.
가부장 사회의 최고의 율법수호자들. 그들은 그 율법의 집을 단 한번만 벗어나서 세상을 보면, 희망이 온 세상에 꽃처럼 가득 피어있다는 게 보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