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자지(知人者智)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 소크라테스
초등학교 다니면서부터 부모님을 무시하게 되었다. ‘신학문’을 배우고 보니, 부모님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낡아보였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스럽다. 어린 자식이 학교에서 배웠다며 대드니, 부모님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학교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는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아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잘 배우기만을 바라셨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이라는 것들은 서양의 학문이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하는 객관적 지식들.
노자는 이런 지식들을 지(智)라고 했다. 지금은 이 지를 지(知)와 구분해서 쓰는 것 같다.
지(智)는 지혜, 지(知)는 지식. 하지만 노자는 이 둘 다 지(智)라고 본다. 왜? 둘 다 ‘분별력 있는 지식’이니까.
분별력 있는 지식은 세상을 둘로 나눠서 보는 것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높음과 낮음...... .
하지만 이 세상의 실상은 둘로 나눠지지 않는다. 선과 악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빛과 어둠도 하나로 존재한다. 아무리 밝은 곳도 어둠이 전혀 없는 곳은 없다. 높음과 낮음은 상대적이다.
이 둘을 하나로 보는 것은 지의 영역이 아니다. 지의 영역은 언어로 보는 세상이다. 언어는 둘로 나눠져 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 자체이니, 우리의 생각은 결국 분별력 있는 지식이다. 이 세상의 실상을 알려면, 생각(언어)을 넘어서야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했다. “남을 아는 것을 지(智)라고 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한다. 지인자지, 자지자명 知人者智, 自知者明.”
명(明)은 분별력 있는 지식이 아니라, 통합적 시각으로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일컫는다.
척 보면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지자불언 언자부지 知者不言, 言者不知.”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앎은 지를 넘어선 명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죄와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혐의로 멜레토스에 의해 법정에 기소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언도받고는 최후 진술을 했다. “자, 이제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하지만 나와 여러분 가운데 누가 더 좋은 쪽으로 가는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신만이 아는 영역’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신(神)은 우리 안에 있으니까. 우리 안의 신성(神性)이 아는 것이 명일 것이다. 지는 우리의 이성으로 아는 것이다.
근대과학적인 지식은 눈에 보이는 어떤 측면에서만 맞는 지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지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한다.
우리가 미신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신만이 아는 영역이다. 지식으로 알 수가 없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지를 떨쳐버리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자신을 아는 명은 결국에는 자신을 넘어서 이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할 것이다.
현대의 눈부신 물질문명은 지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정녕 잘 살게 되었는가?
이제 우리는 명을 앎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현대 인류가 처한 총체적 위기는 명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빌딩들 사이에서 오백원으로
급히 펼쳐든
푸른 비닐의 공간
난 오래 잊고 있었던 은행의 비밀번호를
기억해낸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
난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유일하게 빗방울들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푸른 비닐을 두드리며 황홀하게
나의 비밀번호를 호명하는 물방울의 목소리
나는 열리기 시작한다
- 유하, <푸른, 비닐우산을 펴면> 부분
‘푸른 비닐을 두드리며 황홀하게/ 나의 비밀번호를 호명하는 물방울의 목소리/ 나는 열리기 시작한다’
우리도 시인처럼 이런 신비스러운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명(明)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느낌을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시인은 언어로 표현한다. 이 언어는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시어(詩語)다.
우리가 명의 순간을 만날 때,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의 세계를 넘어서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