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사람아 사람아
사람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그들의 눈빛은 산길을 가다 만나는 나무 열매처럼 슬프다.
그래서 그들을 보듬어 준다. 그러다 그들에게 몇 번 당했다. ‘아,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데, 왜 다가온 거야?’
나는 자라면서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눠 보았다. 아마 거의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럴 것이다.
그래서 만화에서는 항상 선한 주인공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악당들을 처단하고 영웅이 되어 귀환한다.
아이들은 악당들의 말로를 고소해하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을 보며 뿌듯해하며 자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런 아이가 있다. ‘착한 아이’ 착하게 살면 결국에는 좋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아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다. 공부모임에 오시는 분들 중, 장남이나 장녀들이 그렇게 살았다.
그들은 부모 대리자 역할을 하면서, 은연중 ‘이렇게 가족들에게 헌신하면 결국에는 잘 되겠지’하는 믿음을 갖고 살다가 결국에는 배신을 당했다.
이렇게 당하다 보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 배신당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오른손이 하는 선한 행동을 왼손이 모르게 했는가?’
알게 했다면, 그건 선한 행위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보상을 바란 것이다. 사람은 받았다고 해서 주는 게 아니다.
받았을 때 계산해 본다. ‘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만만한 가족들에게는 그냥 넘어가려 한다.
가족주의를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현자 순자가 말했듯이, ‘인간은 악한 존재’다.
인간에게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라는 의식이 있어, 나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중국 전국시대의 현자 맹자가 말했듯이, ‘선한 본성’이 있다. 인간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감수성을 타고나는 것이다.
성악설(性惡說)의 순자와 성선설(性善說)의 맹자, 누가 맞을까? 둘 다 맞다. 두 사람은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던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자아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이 자아는 언제든지 악하게 될 수가 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온 우주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이 자아가 인간 내면의 동물적 본능과 만날 때다.
하지만 이 자아가 인간의 본성(本性)과 만나면 한없이 선해진다.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이게 인간이다. 악마와 천사 사이. 그 어디쯤에 인간이 있다. 우리가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꿈꾸는 성격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많이 당했다. 돈도 떼이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 나의 마음을 깊이 있게 성찰하지 않은 참혹한 대가다. 성찰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동물이 된 인간이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 당연히 그 업보(業報)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억울하게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울부짖었다. “하늘의 도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게 하늘의 도인가?”
그는 분노가 터져서 책을 썼다. 인간의 극한에서 불후의 고전 ‘사기(史記)’가 나왔다.
인생은 고(苦)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삶의 모든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인생은 시인 천상병이 노래하는 ‘소풍’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