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환상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남자 주인공 미하엘은 15세에 36세의 ‘불멸의 여인’ 한나를 만난다.
활활 불 타 올랐던 그들의 사랑은 한나가 어느 날 홀연히 미하엘을 떠남으로써 한순간에 꺼져버린다.
미하엘은 잿빛 세상에서 살아간다. 법학도가 된 그는 어느 날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거기서 법정에 선 한나를 만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감시인 노릇을 했던 한나는 나치 전범 피의자가 되어 있었다.
미하일은 한나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현실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에게 날아가려는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중력의 악령을 그는 뿌리치지 못한다. 그의 사랑의 의지는 중력보다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나는 종신형을 언도 받고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그는 소년 시절에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것처럼, 여러 명저들을 자신의 육성으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들을 그녀에게 부쳐준다.
그녀가 답장을 보내지만 그는 답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드러내기가 두려운 사랑, 그의 가슴 깊숙이 숨겨둔 사랑이다.
그는 함께 법학을 공부했던 게르트루트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게르트루트와 포옹할 때마다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손길이나 감촉, 그녀의 냄새와 맛, 그것은 내가 찾던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이혼에 이르게 된다. 한나는 그의 집단무의식 속의 여인, 아니마다.
15세 소년에게 강하게 각인 된 한나와의 사랑, 그는 사랑의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환상이 된다. 그 환상에서 벗어나려면 청춘시절에 많은 사랑을 해보아야 한다.
남녀가 사랑을 할 때, 각자 무의식 속의 아니마, 아니무스가 깨어난다. 아니마, 아니무스가 다 깨어나면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이 깨어난다.
영혼이 깨어나게 되면, 한 인간의 인격은 완성된다.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심층심리학자 칼 융은 말했다.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미하엘은 자신의 짝이 밖에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머리로만 공부하고, 몸으로 사랑을 한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사람은 청춘 시절에 여러 유형의 이성과 사랑을 해보아야 한다. 아니마, 아니무스를 다 깨워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현실의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사랑의 환상에서 자유로워져야, 남녀의 만남이 영적인 차원으로 상승한다. 삶의 진정한 동반자, 영적인 벗이 될 수 있다.
남녀의 사랑은 인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다. 한용운 시인은 여연화라는 여인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된다.
이 사랑이 한용운 시인을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그는 말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남녀의 사랑과 인류애는 하나인 것이다. 남녀의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추상적인 사랑을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아도, 눈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