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사는 죄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구절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지멘스에 취직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인가?” 그것은 재판장을 향해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큰 소리로 그녀가 자신에게 말한 것이었다. 주저하면서. 그녀가 주저한 까닭은 그 질문을 여태껏 자기 자신에게도 한 적이 없으며, 또 그것이 올바른 질문인지 그리고 그 답변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나 슈미츠, 그녀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정권에서 친위대로 복무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막연히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확히 의식적으로 아는 게 중요하다.
명확히 언어로 자신의 죄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벌을 받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 콜리니골프는 소냐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죄를 명확히 알게 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된다.
그녀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것 같다. 문맹이었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재판정에서 자신이 문맹임이 탄로 날까 두려워 자신이 사인하지 않은 고소문을 자신이 썼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녀가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그녀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일이 무죄가 될 수는 없다.
그녀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사회 규범을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자신의 친위대 경력을 천재지변 같은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참담한 경험으로 인해 그녀는 항상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시달렸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어, 죄 짓고는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명확히 모를 때 사람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소시민’으로 살아왔기에 그녀는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깨어 있는 시민이 될 기회가 있었을까?
국가가 언제 그녀에게 시민으로서의 인문학적인 교양을 배울 기회를 주었는가? 그런데 국가는 그녀를 단죄한다.
그럼 국가는 자신의 죄를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국가는 하나의 허상이다. 기호일 뿐이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국민, 시민이 그 이름을 불러줘야 국가는 존재한다. 국가는 거대한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 같은 선량한 시민, 당당한 국민이었던 유대인들이 안타까이 그 이름을 부를 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이론’을 제안했다. 국가, 사회 같은 어떤 체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는 이론이다.
학교의 ‘왕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왕따가 나오는 이유는 단편적인 지식위주의 학교 교육, 이 지식으로 학생들에게 서열을 매기는 잔혹한 학교 교육에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학교 교육은 개선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장 약한 자, 왕따에게 십자가를 지워 불합리한 교육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자살한 왕따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참으로 착한 아이였는데...... .” 왕따는 ‘숭고한 인간’이 되어 저 세상으로 사라져버린다.
피의 축제를 벌인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주체는 결국에는 사람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깨어있어야 한다. 민주, 민(民)이 주(主)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평상시에 깨어 있는 국민,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한나 슈미츠 같은 ‘생각 없이 사는 죄’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