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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최고야!

by 고석근

건강이 최고야!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한하고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디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미를 밝힐 수 있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는 “건강이 최고야!”라는 자주 말을 한다. 이 말에는 이 시대의 불안과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대 중국의 철인 장자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 사신 두 사람이 찾아왔다.


두 사신이 말했다.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나라에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북이가 죽은 지 3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초나라 왕은 사원의 재단에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그 거북이는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였겠습니까?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닐지라도 평범한 거북이로 살아 있기를 원하였겠습니까?”


두 사신이 대답했다.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을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겠지요.”


장자는 자신도 “진흙 바닥을 기어 다니는 거북이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건강이 최고야!”가 장자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건강할 때 장자처럼 한가하게 여기저기 거닐며 인생을 즐길 수 있을까?


우리는 건강할 때는 권태를 느끼게 된다. 우울증 등 온갖 정신질환이 찾아오게 된다.


건강하지 못하면 고뇌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은 한평생 고뇌와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


우리가 장자처럼 한가롭게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은,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일상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디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미를 밝힐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내가 누구야? 어떻게 살아야 하지?”하고 묻지 않는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존재 망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자신의 존재를 계속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남들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양 말하고 행동하며 남들의 꼭두각시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인간, 좀비다.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으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 내던져져 있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우리 안에서 신(神)적인 무한한 힘이 솟아올라오게 된다.


자신과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신묘한 세계를 보게 된다. 그 세계가 우리의 진짜 세계다.


이것을 장자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이라고 했다. 이 세계에 들어서게 되면, 자신이 곧 이 우주 자체이기에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생사(生死)에서 자유롭게 된다.


장자처럼 ‘고귀한 희생제물의 삶’을 거부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장자처럼 자유롭게 살 수 없을까?


고대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생명에는 조에(육체적 생명)와 비오스(사회적 생명) 두 개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조에’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몸만 있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이 최고야!”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몸이 건강했을 때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신의 몸 하나를 소중히 하며 살아가게 되면, 비오스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몸이 원하는 것을 하고 몸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몸은 우리 자신이면서도 천지자연이다. 몸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면, 사회적 생명은 뒤에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장자가 가르쳐 주는 ‘인간의 길’이다. 조에와 비오스는 결국 하나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둘로 보기에 둘 다 잃어버리고 있다.


나는 내 인생의 큰 고비에 몸의 소리를 듣고 결정한 적이 있다. 불가능해 보일 때 몸이 가라고 하면 갔었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길이 생겨났다. 홀로 내팽개져 있을 때는 귀인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험을 몇 번 하면서 나는 몸의 소리가 신, 하늘의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현들은 몸의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도 간절하게 귀를 기울이면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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