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하여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핀다. 존재의 연령은 영원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중국 명대의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은 제자들과 함께 산길을 가고 있었다.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마음 밖에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산의 꽃은 스스로 피고 지는 것이 아닙니까?’
왕양명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네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는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모두 적막하였다. 하지만 자네가 이 꽃을 보자마자 이 꽃의 모습이 일시에 드러났다.”
우리는 삼라만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배웠다. 개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연구하는 것이 근대 학문이다.
우리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의 과학을 공부하면서 물질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왕양명은 ‘마음이 곧 이치이다. 세상에는 마음만이 있으며, 마음 없이는 아무런 이치도 없다. 심즉리 心卽理.’고 하니 제자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들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산길을 가다 만나는 꽃 한 송이, 저 꽃은 객관적으로 저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왕양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네가 이 꽃을 보자마자 이 꽃의 모습이 일시에 드러났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현대양자물리학에서는 물질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기에 실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물질은 우리가 볼 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관찰자 효과’다.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 너무나 다르다. 우리가 보면 저 사물이 나타나고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니?
왕양명, 양자물리학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가 볼 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안 볼 때는? 에너지로 존재한다. 이 세상의 실상은 에너지장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지금 존재하는가? 아니다. 우리의 감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몸이 실재한다고 믿는 것은 미망이다. 깨달은 사람은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본다.
한국 근대의 최고의 선사로 불리는 경허 선사는 죽을 때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경허 선사는 마음이 만상을 다 삼켰다고 노래한다. 왕양명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니 삶과 죽음도 마음의 문제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마음의 빛이 비춰 ‘나’와 세상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공(空)이다. 텅 비었다. 실체가 아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은 다시 꽃 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모든 것은 다시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죽음’이 왔다.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니체는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라고 했다.
누구나 죽을 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적막 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경허 선사는 죽음 앞에서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하고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의 연령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도전을 그는 이렇게 멋지게 통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