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요?
우리는 더 이상 신분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이다. 그러나 돈은 힘이고 명성이고 존엄이고 우월함이며 영향력이다. 이제 돈은 사람이 그것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한 인간을 평가하는 크고 작은 도덕적 편견을 형성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에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는 대붕과 참새가 등장한다.
‘저 먼 북쪽 깊고 어두운 바다에 곤(鯤)이라는 커다란 물고기가 사는데, 이 물고기가 새로 변하여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면 대붕(大鵬)이 된다고 한다. 대붕은 날아오르는 높이가 구만리나 된다고 한다.’
참새들이 대붕을 보고 비웃는다. “우리는 온힘을 다해 날아올라도 능금나무나 느릅나무에 부딪혀 떨어진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 대붕은 겁도 없이 구만리나 솟구쳐 남쪽으로 가는 것일까?”
장자는 말한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참새는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일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스스로 진화하려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는 진화하지 않으려는 인간이 등장했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참새의 자유다. 이들은 결국 인간의 위계를 믿지 않으면서 돈의 위계를 믿게 된다. 그들은 ‘돈은 힘이고 명성이고 존엄이고 우월함이며 영향력’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들은 구만리 창공을 날아오르는 대붕을 비웃는다. 하지만 이 세상은 저 높은 창공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참새들은 자신들의 생각의 우물에 갇혀 있다. 큰 지혜로 살아가는 대붕을 작은 지혜로 살아가는 참새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니체는 신이 죽은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초인(위버멘쉬)’을 제시했다. 니체는 “초인은 대지의 뜻,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창조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땅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정신이 구만리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슈퍼맨’이 아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 예술은 인간을 현재의 시간 속에 살아가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고 말했다.
인간은 물질이면서 동시에 기(氣 에너지)다. 물질인 육체는 생로병사를 겪는 시간 속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에너지이기에 생로병사도 없고 시간도 없다. 영원한 우주의 율동이다.
대붕과 초인은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인간의 상징이다. 참새, 최후의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참새들은 대붕의 뜻을 알아야 한다.
최후의 인간들이 참새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대붕을 무시하고 비웃게 되면, 이 세상은 아비규환의 세상이 된다.
민주주의는 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다. 그러다보니 참새들은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고향인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대붕 소크라테스를 독배를 마시고 죽게 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민(民)이 대붕, 초인이 되어 주(主)가 되지 않으면 왕정, 귀족정보다도 못한 제도다.
참새들이 대붕의 뜻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참새들이 대붕을 몰라보면, 사이비 대붕들이 판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