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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

by 고석근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 니체, <선악의 피안>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를 찾아가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좌우명을 부탁드렸다.


이에 원효대사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마디 던졌다.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


설총이 어리둥절하여 “그럼 악한 일을 하고 살라는 말씀입니까?”하고 되물었다. 이에 원효대사가 일갈하였다. “착한 일도 하지 말라 하였거늘 하물며 악한 일을 생각하느냐?”


우리는 착하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착하게 살게 되면, 마음 깊은 곳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겨난다.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만한 크기의 그림자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의식적으로 착한 생각을 하게 되면 그만한 크기의 악한 생각이 무의식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차츰 선한 행동이 위선이 될 수가 있다. 이 위선이 심해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의 그림자를 남에게 투사하게 된다.


남의 조그마한 약점에도 참지 못한다. 이 투사가 커지게 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내 안에 악마가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알 수 없는 살인 충동에 휩싸여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아들 설총에게 “착하게 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럼 악한 일을 하고 살라는 말씀이냐?”고 되묻는 설총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을 선명하게 나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착한 아이’가 되기 쉽다. 누구나 어릴 적에는 부모님에 의해 착한 아이로 훈육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한 아이로 길러진 우리는 착하게 살면,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보상이 주어지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니체는 말했다.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선(善)과 악(惡)은 선명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도덕적 해석만이 선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착하게 살아가려면, 오른 손으로 하는 선한 행동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말했다. 이것은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생기(生氣)가 나고 신명(神明)이 나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마구 주게 된다.


이게 진정한 선행이다. 이때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니체는 이런 선행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힘에의 의지가 약화된 것을 악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천지자연의 강한 기운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자꾸만 그 기운을 잃어간다. 이 기운이 약화되는 마음이 악(惡)이다.


‘버금(亞)가는 마음(心)’이 되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本性)을 잃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켜가야 한다.


늘 마음을 살펴보고 중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중심을 잃어버린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항상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친지자연과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가 마음을 고요하게만 하면, 천지자연의 기운이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아 준다.


화가 났을 때는 화난 마음을 고요히 응시해야 한다. ‘나 지금 화가 났어!’ 이렇게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고만 있으면, 그 화난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본성)이 깨어난다.


이 마음이 화난 마음을 가라앉게 해준다. 이것이 알아차림 명상법이다. 우리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마음에 끌려가기 쉽다.


흔들리는 마음이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항상 마음 상태를 알아차려서 우리 안의 본성이 알아서 해결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천지자연의 운행원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작은 마음에서 벗어나 내면의 본성, 천지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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