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사람이 올시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몸의 도구, 즉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그것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하운 시인은 그의 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에서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라고 노래한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고 부르면, 나는 문둥이가 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인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존재가 정해지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왕이라고 부르면 왕이 되고, 사람들이 노예라고 부르면 노예가 된다.
한하운 시인은 젊은 시절에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뜻하지 않은 나병에 걸리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문둥이가 된 그는 집을 나와 세상을 떠돌게 된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호적도 없이/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어처구니없는 사람이 올시다’
문둥이가 된 그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된다. 그는 분명히 사람인데, 몸이 아픈 사람일 뿐인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생명이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생명, 조에(zoe)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생명, 비오스(bios)다.
한하운 시인이 공무원일 때는 두 개의 생명이 있었다. 하지만 문등이가 되자 육체적 생명은 있는데, 사회적 생명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시인은 하루아침에 반쪽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고 울부짖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그는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추운 한 겨울에 얼굴에 보자기를 쓴 한 여인이 서산의 천장암으로 경허 선사를 찾아 왔다.
경허 선사는 자신의 방에 여인을 들이고는, 계속 숙식을 함께 했다.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니 스님이 여인과 한 방에서 지내다니!’ 경허 선사의 수제자 만공 스님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참다못한 스님들이 몰려왔다. 경허 선사가 “모두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다들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보자기를 얼굴에 쓴 여인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보자기를 벗었다. 다들 경악했다.
여인의 얼굴과 손발은 뭉그러져있었다. 그녀는 문둥이였던 것이다. 문둥이 여인은 경허 선사에게 큰 절을 하고는 조용히 천장암을 떠났다.
경허 선사는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천장암을 떠나 세상을 떠돌다 환속했다고 한다.
경허 선사의 경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생사(生死)를 초탈하지 않고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행동이 아닌가?
깨달음을 얻은 경허 선사의 눈에는 문둥이 여인은 온전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단지 지금 몸이 아픈 사람.
그래서 그는 극진히 간호를 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신을 의심하다니! 만공마저! 그는 잘못했다고 울부짖는 제자들을 뒤로 하고 훌훌 떠났다.
남은 제자들은 그가 떠남으로써 더욱더 분발할 것이다. 그는 떠나면서도 큰 가르침을 준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아라!” 스승이 떠난 뒤에도 제자들은 스승의 목소리를 계속 들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니체가 말하는 ‘작은 이성’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깨달아야 한다. ‘작은 이성은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그것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작은 이성은 ‘자아(自我, ego)의 이성’을 말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인간의 진짜 마음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커다란 무의식에 있다. 이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자기(自己, self)가 있다.
자기는 천지자연 그 자체다. 자기가 진정한 나라라는 것을 깨닫는 게 공부의 첫걸음이다.
자아가 중심인 제자들의 눈에는 ‘스승과 여인이 한 방에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어 자기가 중심이 되면, 여인이 여인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