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신이 되어라

by 고석근

네 자신이 되어라


네 자신이 되어라.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아니다. 양심의 소리를 따르면 된다.

- 니체, <반시대적 고찰>



나는 요가를 배운지 30년이 넘는다. 그동안 요가를 하지 않은 적도 많았지만, 요가를 놓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아직도 원래의 몸이 되지 않고 있다. 요가는 아이의 몸이 되는 게 목표다. 아이는 병에 잘 걸리지 않고 넘어져도 잘 다치지 않는다.


한없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몸은 기가 원활히 흐른다. 노자는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라고 했다.


마음은 어떨까? 한번 비틀어진 몸을 원래의 몸으로 회복하는 게 이리도 힘이 드는데, 비틀어진 마음을 원래의 마음으로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방식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돈오돈수는 한번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사상이다.


깨달음을 얻었는데도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해탈(解脫)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돈오점수는 깨달음을 얻어도 계속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몸에 깊이 배인 중생의 습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오는 견성(見性)을 말한다. ‘본래의 나’를 확연히 본 것을 말한다. 자아(自我)는 허상이고 자기(自己)가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달은 것이다.


경허 선사는 점수는 견성 이후의 삶이라고 말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돈오돈수, 돈오점수 어느 게 맞을까? 젊을 적에는 “정말 확철대오(廓撤大悟)하게 되면 무슨 수행이 더 필요하냐?”고 일갈했던 성철 선사의 말에 수긍이 갔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며 경허 선사의 돈오점수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내가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김언희 시인은 ‘이봐, 오늘 내가’하고 소리치며 추악한 추억이 수시로 찾아오는 악몽 같은 삶을 노래한다.


‘문이, 벌컥/열리고 헐레벌떡 추억은/되돌아온다 마치 잊은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추악한 삶보다 끔직한 것은 추악한 추억’


누구나 이러한 끔찍한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오래된 나무들을 보면, ‘추악한 추억들’을 안고 살아간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힘겹게 허공으로 올라간다. 수백 년 전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허 선사도 큰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과거의 추악한 추억들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주색잡기’를 한 파계승으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겉으로 보면 분명히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나는 그의 깨달음의 세계와 그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어떤 평가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오도송이나 임종게를 읽어보면, 내 마음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고 커진다.


나는 한순간에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들어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사람이 이렇게 위대할 수도 있구나!’


‘인간 경허’로 그의 삶을 보면, 주색잡기는 오랜 중생의 습을 떨쳐버리는 수행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 수행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 몸에 배인 추악한 추억들을 어떻게 떨쳐 버려야 할까?


떨쳐 버리지 못하면, 추악한 추억들은 수시로 ‘이봐, 오늘 내가’하고 소리치며 헐레벌떡 찾아온다.


그의 삶 자체가 설법이 아니었을까? 그야말로 그의 삶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의 마음에 가득 찬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투성이의 세상 속에서 살다갔다.


그의 임종게는 맑디맑다. 그는 자신의 아픔들을 다 안고 살아가다 끝내는 완전한 자신이 되었다.


수없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 중생들에게 이만한 가르침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지금도 우리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미친 사람으로 말년을 살다 간 니체는 말했다. “네 자신이 되어라.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네가 아니다. 양심의 소리를 따르면 된다.”


미친 사람이 정상인으로 치부되는 이 세상, 니체는 미침으로써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다갔다.


티 하나 없는 맑디맑은 하늘처럼 살다가는 것은, 무생물들뿐일 것이다. 저 돌멩이야말로 얼마나 고결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는 완벽한 성인(聖人), 신(神)이 아닌가? 그런데 먹지 않아도 되고 누가 밟아도 비명하나 지르지 않는 그를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가?


나는 조금만 아파도 비명을 지르는 인간이 좋다. 남의 생명을 먹어야 살아가는 운명인, 너무나 슬픈 인간이 좋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다 간 경허 선사, 모든 추악한 추억들을 고스란히 안고 살다간 그의 삶은 이 세상의 우주목(宇宙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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