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넘어서

by 고석근

언어를 넘어서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져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란 경허 선사는 20대초의 젊은 나이에 불교 경전을 두루 통달했다.


하지만 그가 콜레라가 창궐하는 마을에 들어서자, 모든 불교의 지식들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죽음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하나의 작은 생명이었다. 그는 경악했다. ‘오! 그 많던 불교의 교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다시 동학사로 되돌아가 모든 교리를 잊고 온 몸으로 삶과 죽음에 맞서는 수행을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수없이 가르쳤을 것이다. 그는 경전을 한번만 보면 다 외었다고 한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삶과 죽음은 하나다. 하지만 막상 죽음 앞에 서자 삶과 죽음은 엄연히 두 개였다.


왜 그럴까? 지식은 언어로 익힌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을 한다. 생(生)이라는 언어가 있고 사(死)라는 언어도 있다.


따라서 아무리 생사일여라고 배워도, 생과 사는 두 개로 나눠진다. 언어를 넘어서야 생사일여가 된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가 끊어져야 한다. 생과 사라는 언어를 모르는 아이들은, 생과 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온 몸에서 솟아올라오는 삶의 환희를 느낀다. 그러다 언어를 배워가며 생생한 삶이 언어에 갇히게 된다.


언어에 갇힌 몸은 지식은 그득할 수 있지만, 지혜는 없다. 지혜는 언어가 끊어져야 깊은 본성에서 솟아올라오기 때문이다.


깨달음, 해탈, 득도는 언어로 세상을 보다가 언어를 넘어서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삶과 죽음은 언어로는 두 개이지만, 실상은 하나다. 우리 몸을 물질로 보면 죽음이 있지만, 에너지 장(場)으로 보면 죽음은 없다.


언어에 갇힌 사고는 물질의 세계만 본다. 언어가 끊어진 몸에서는 마음의 눈이 깨어난다. 물질을 넘어서는 세계가 보인다.


언어는 이분법이라, 항상 물질의 세계를 두 개로 나눠서 본다. 사랑과 미움, 좋음과 싫음, 높음과 낮음... .


하지만 이 세상의 실상, 진짜 모습은 그 두 개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미움도 함께 따라온다.


밤과 낮도 실상은 하나다. 낮에도 여기저기에 어둑한 밤이 있고, 밤에도 여기저기에 훤한 낮의 요소가 있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바다의 미풍’을 타고 하늘을 날아간다.


‘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노라./떠나버리자, 저 멀리 떠나버리자.’


육체는 슬프다. 언어에 갇혀 있으니까. 모든 책을 읽어서 그렇다. 육체는 사실 에너지다. 바람이다.


‘나는 떠나리! 선부여, 그대 돛을 흔들어 세우고 닻을 올려/이국의 자연으로 배를 띄워라.’


‘잔혹한 희망에 시달린 어느 권태는/아직도 손수건의 그 거창한 작별을 믿고 있는지’


육체가 언어에 갇히게 되면, 생로병사를 겪게 된다.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 잔혹한 희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다 우울증이 오고 권태가 온다. 인간 몸의 실상은 에너지이기에 헛것인 물질, 육체로 살아가면 생생한 삶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인은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른다. ‘오 나의 가슴아, 이제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라.’


그렇다. 드디어 시인은 생생한 삶을 되찾았다. 뱃사람들의 싱싱한 노랫소리를 듣게 되었다.


니체가 말하듯 ‘진리는 미풍을 타고 오는 것’이다. 경허 선사도 ‘콧구멍 없는 소’라는 미풍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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