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구멍 없는 소
그대의 사상과 감정 뒤에, 나의 형제여, 강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것이 자기라고 일컬어진다. 그것은 그대의 몸속에 살고, 그것은 그대의 몸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경허 선사는 깨달음의 경지를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문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라고 노래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소에 비유한다. 소는 사람이 길들인 가축이다. 마음도 이와 같이 ‘길들여야한다’고 보는 것이다.
소는 길들일 때 코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콧구멍에 고삐를 매어 소를 길들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가 발버둥을 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명령대로 따르지 않으면 코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소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차츰 사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게 서서히 습성이 되어 완전한 가축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길들여야 할까?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이런 방법을 쓴다. 사탕과 채찍이다.
아이는 처음에는 어른의 명령에 발버둥을 치고 반항을 한다. 그러다 차츰 사탕과 채찍에 길들여진다.
서서히 어른의 말씀이 내면화되고 나중에는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어른의 뜻대로 하게 된다.
한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간을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크게 보면 이런 인간은 가축이 된 것이다. 겉으로 예의 바른 인간이 진정한 인간인가?
동물적인 자극과 반응에 의해 길들여진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럼 진정한 인간은 어떻게 탄생할까?
모든 종교와 철학은 진정한 인간의 탄생을 목표로 한다. 경허 선사도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혼자 방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용맹정진을 했던 것이다.
졸음을 막기 위해 칼을 턱 아래에 꽂아 놓고 참선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들려온 말, ‘콧구멍 없는 소’ 그 순간, 그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하게 되었다.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와 껄껄 웃어 제쳤다. 모든 의심이 구름이 걷히듯 사라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왜 소처럼 마음에 구멍을 뚫어 억지로 길들여야 해?’
‘마음은 그 자체로 자유인 거야! 천지자연은 스스로 굴러가지 않는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 그렇다. 마음은 천지자연 그 자체다! 그럼? 삼천대천세계도 내 마음이네. 그럼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이라는 거네?’
인간의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물질이지만, 실상은 기(氣), 에너지장이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몸을 물질로만 보면 생로병사를 겪지만, 에너지로 보면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오로지 무한한 생성, 변화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만 끊으면 영생이 된다. 그런데 이 집착을 어떻게 끊나?
단박에 내 몸이 물질로 보이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을 확연히 아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대자유(大自由)’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오랫동안 몸을 자신이라고 생각한 습성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몸에 대한 집착이 서서히 사라져가게 될 것이다.
경허 선사는 정진하는 몇 달 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아 이가 온 몸에 득시글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가려운 몸을 단 한 번도 긁지 않았다고 한다. 몸에 대해 명상을 했을 것이다.
가려워하는 몸을 보며, 그것이 온전히 실체가 아니라 느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 결국 마음이구나!’ 그는 자신의 몸이 친자자연과 함께 운행하는 신비를 보았을 것이다.
‘삼천대천세계가 내 마음이고 내 집이로구나!’ 물아일체(物我一體), 만물제동(萬物萬物齊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다. 불성은 천지자연과 하나인 마음이다.
불성은 니체가 말하는 우리의 사상과 감정 뒤에 있는 ‘강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 자기’다. 그것은 ‘우리의 몸 그 자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아(自我), ‘나’라는 의식이 있어, 천지자연과 하나인 마음을 잊기 쉽다.
나를 의식하니,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부터 챙기게 되는 것이다. 자아가 진짜 나가 아니라 불성이 진짜 나라는 것을 확연히 아는 것이 불교 공부의 시작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은 ‘자신의 본성이 곧 불성임을 본 것’을 말한다.
경허 선사는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자신의 불성을 깨닫게 되었기에, 그는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