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
- 노자 老子(BC 500?-BC400?, 고대 중국의 철학자)
오래 전에 인터넷 신문에서 읽은 글이다. 법정에서 한 고소인이 증거를 대라고 다그치는 판사의 말에 혼자 중얼거렸단다.
“증거는 무슨 증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
그 고소인의 눈에는 근대 형법의 기본 원칙인 ‘증거주의’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보였을 것이다.
‘왜 자꾸만 증거를 대라는 거야? 아니 그럼, 증거가 없으면 있는 죄도 없게 되는 거야?’
오랫동안 시골의 공동체 마을에서 살아온 그의 눈에는, 근대도시문명의 한계가 뚜렷하게 보였을 것이다.
근대의 도시에서는 모든 사람이 가문, 공동체 사회를 벗어나 ‘개인’이 된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개인주의가 황금만능사회와 맞물리게 되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가 된다.
전체 사회의 정의를 위한 법이 강자의 이익이 되고 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 자전거를 타고 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하고 바라보다 화들짝 놀랐다. ‘아, 아이를 마중 나온 학부모님들이었구나.’
아이가 나올 때마다, 아이의 부모님이 활짝 웃으며 맞이하고 아이는 달려와 안겼다.
진풍경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아이들은 함께 어울리며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얼마 전에 강남의 ㅈ 아파트에 갔다가 단지 내에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는 것을 보았다.
집이 가까이 있으니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이러한 아파트들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앞으로 신도시를 건설할 때, 수천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도시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 사회. 아이가 등하교할 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본다면 아이는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은 도시의 법정에서는 배심원 위주로 재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서로를 훤히 아니까 전체적으로 한 인간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공부모임에서 심리상담사로 활동하는 한 회원이 말했다. “요즘은 정서적으로 메마른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사람은 타고나기를 ‘사회적 동물’이라, 각자도생의 삶에는 온갖 정신질환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시골의 마을에서 자라게 했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잘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마을 아이들과 신나게 놀면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노자는 일찍이 말했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
월요일 오전에는 ㅁ 마을 공동체에서 공부모임이 있다. 쉼 없이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새로운 세상의 시원(始原)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가 하나가 되는 현대문명은 위험하다. 최근의 전염병의 유행들은 위기의 시작이 불과할 것이다.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 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 장정일, <요리사와 단식가> 부분
세상 사람들은 요리사와 단식가가 되었다. 사랑을 끝없이 먹거나, 아예 먹기를 거부하거나.
그 둘은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결국에는 하나가 된다. 서로 먹고 먹히면서.
언젠가는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남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뜯어먹다가 쓰러져 이 세상과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