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
산길을 가는데,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이 지렁이를 보고 있나 보다.
“지렁이는 이제 엄마, 아빠에게 가야 해!” 선생님이 아이들을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이 기어가는 지렁이를 보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얘들아, 지렁이는 지금 이디로 가고 있을까?”
그러면 다양한 답들이 나올 것이다. 그 중에는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기발한 답도 나올 것이다.
왜 선생님들은 은연중에 ‘가족주의’를 가르치는 걸까? 어디선가 본 사진이다. 아빠는 신문을 보고 있고 엄마는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가부장적인 봉건제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개인의 개성이 중요한 시대가 아닌가?
흔히 사회의 최소 단위를 가족이라고 한다. 아니다. 개인이다. 근대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이 권리와 의무의 주체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는 한 인간을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부모, 출신학교 등이 그의 정체성이 되고 있다.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는 지금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가족주의를 가르치다니!
오늘 아침 인터넷 뉴스에서 부모를 토막살인 한 젊은이를 보았다.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한 복수심으로 부모를 살해했다고 했다.
가족주의가 빚어낸 참극이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했기에 ‘사랑의 매’를 들었을 것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속으로 적개심을 마음 깊숙이 쌓아갔을 것이다. 그 적개심이 어느 날 악마가 되어 밖으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며칠 전에 ㅂ 초등학교 학부모회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내 책 ‘시시詩視한 인생’을 이야깃거리로 정했다.
인생은 시시하다. 우리가 개인이 되지 못해서다.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시인(詩人)이 되어야 한다. 자신만의 눈으로, 자신만의 언어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누추한 이 세상은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언어의 안개에 가려졌던 이 세상의 진면목이 말갛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날 만나는 학부모님들만이라도 자녀를 개인으로 길렀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먼저 학부모님 자신들부터 개인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윤동주, <또 다른 고향> 부분
어느 날 시인은 어둠을 짓는 개소리에 쫓겨 백골의 고향을 떠난다.
그는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