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도
어느 날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포도밭을 발견했다. 그러나 포도가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점프도 해 보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포도를 따 먹을 수가 없었다. 여우는 “저 포도는 어차피 신포도일 거야!”하고 투덜거리며 길을 떠났다.
- 이솝,『이솝 우화』에서
오래 전 시민단체 활동할 때 만난 한 활동가를 생각하면, 이솝 우화의 ‘신포도’가 생각난다.
그녀는 학창 시절에 전교 1등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모범생으로 자랐다고 했다.
그녀와 얘기를 하다보면, 그녀의 말이 항상 허공을 떠 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라걱정, 세상 걱정을 항상 하는데, 전혀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술자리에 그녀가 끼면 술자리는 재미없는 자리가 되었다. 그녀는 항상 물 위의 기름처럼 떠돌았다.
여러 명이 함께 술을 마시면, 교향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대화가 하나로 어우러져야 한다.
취중진정발(醉中眞情發), 취중의 말에는 진심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왁자한 술자리가 좋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심이 모여, 거대한 교향악이 되는 장엄한 의례, 우리는 말갛게 씻겨 나온다.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끼게 되면, 그녀는 항상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그녀는 술에 취할 줄을 모른다. 항상 겉도는 말만 한다. 술자리는 소음이 가득한 시장바닥이 되어 버린다.
그녀는 어디서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지식 공부만 열심히 했기에,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힘이 약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여 인정을 받으려 한다. 그녀의 황량한 얼굴 표정.
어느 날 술자리에서, 화가 나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해 보세요!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요! 가슴이 시원하게 다 쏟아내 보세요. 그러자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사실 저 요즘 우울증 약 먹고 있어요.” 그녀의 볼에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진도는 나가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것에 엄청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듯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신포도, 세상에는 ‘신포도의 여우’가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들을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까?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變奏曲)> 부분
사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우리의 욕망이 있다.
우리의 밤 문화는 얼마나 찬란한가!
그 많은 욕망들이 난무한다.
우리는 이렇게 밤마다 장엄한 의례를 행하며, 간신히 사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