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둘이 되었다
하나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곁을 지나갔다.
- 시라토리 하루히코,『니체와 함께 산책을』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실스마리아에 있는 실바플라나 호수를 산책하다가 큰 바위 곁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때 니체는 이 바위를 지나가다 불현듯 ‘영원회귀사상’의 강렬한 영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영원회귀사상’은 모든 것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상이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이해하는 게 무척 어렵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 사상은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니체처럼 ‘영원회귀사상’에 사로잡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회귀사상’을 알 수 없다. 우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머리로 알 수 없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오랫동안 ‘수학적 이성’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 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하며 ‘생각하는 주체’를 탄생시켰다.
우리는 학교 교육에 의해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주체는 전 지구적인 기후 위기와 전례 없는 양차 세계대전의 대재앙을 가져왔다.
니체는 이러한 생각하는 주체를 극복하려 했다. 그에 의해 현대철학이 열린 것이다.
현대철학은 생각하는 주체를 거부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사상을 생각하는 주체가 되어 이해하려 한다.
우리도 니체처럼 힘에의 의지(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신명)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안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니체의 ‘영원회귀, 카르페 디엠, 아모르파티(운명에 대한 사랑)’를 알 수 있다.
니체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 실스마리아를 산책하다. ‘하나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곁을 지나갔다.’고 했다.
그의 안에서 밖으로 떨어져 나온 ‘차라투스트라’, 그는 그와 함께 걸으며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듣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불후의 명저를 썼다.
그의 저서들은 다 받아 쓴 것들이다. 그의 피가 쓴 것들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나는 피로 쓴 글씨만 믿는다.”
인간은 ‘나’라는 의식, 자아(自我)가 있어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한다.
이 자아의 사고를 넘어서야 진리가 보인다.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자아를 죽인 마음이 되어야 한다.
자아를 죽인(冥) 마음작용(想)이 명상(冥想)이다. 니체는 몇 시간씩 산책하며 명상 상태에서 메모를 하고 글을 썼다.
오, 인간이여! 조심하라!
깊은 한밤이 무슨 말을 하는가?
- 프리드리히 니체, <명정(酩酊)의 노래> 부분
시인은 항상 소리를 듣고 말을 했다.
성인(聖人), ‘듣고(耳) 말(口)하는 임무(壬)를 행하는 사람(人)’이었다.
우리도 그의 귀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