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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理性)을 넘어서

by 고석근

이성(理性)을 넘어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영국 철학자)



최근에 ㅂ 독립서점에서 청년 대상의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철학도인 한 수강생이 질문을 했다.


“이성(理性)을 거부한 니체와 이성을 신뢰한 하버마스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철학도 답군!’ 아마 대학에서 이렇게 배웠을 것 같다.


대학 입시 문제로도 좋은 문제일 것이다. 두 사람을 대비하면, 이성의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날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공부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차츰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결국에는 허무주의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 이성을 넘어서 힘에의 의지를 강조한 니체 참 멋있어!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이성을 무시하고 살 수가 있나? 하버마스가 맞지. 근데, 이 세상이 이성적으로 돌아가고 있나?’


머리로 공부하게 되면, 삶이 피폐해진다.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공부해보자. 니체! 머리를 텅 비우고 마음을 다해 니체의 글을 읽어보자.


온 몸의 피가 그의 목소리를 따라 들끓게 될 것이다. 니체와 우리는 거대한 파동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 신비스러운 체험을 해야 한다. 니체는 피로 글을 썼다. 우리도 피로 그의 글을 읽어야 한다.


온 몸의 피가 들끓을 때, 우리는 비이성적(非理性的)이게 되는가? 아니다. 머리는 맑디맑아진다.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합리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두 사람의 사상은 실제의 삶에서는 모순이 되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하면 정반대의 사상 같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언어로 본다. 세상은 모순으로 보인다. 나와 남이 둘로 보이고, 나의 마음도 선악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생생한 삶속에서는 모순으로 보였던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게 된다. 역설이 된다.


니체와 같은 불타오르는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합리적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다. 빈곤한 내면으로 인해 그는 자신 안에 꽁꽁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이 풍부해야 남이 보인다. 남과 합리적으로 의사를 나누고 싶어진다.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사회를 꿈꾼 그리스 아테네. 그 사회는 직접민주주의를 했다.


모든 시민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 삶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시민의 역량 부족으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되었다.


민주시민의식이 너무나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는 하버마스의 합리적 의사소통이론은 공허하다.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 각자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와 하버마스의 사상은 관념의 유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사상은 허공을 떠도는 메아리가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음(音)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청년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며 자신들이 거듭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작은 공부모임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예감할 수 있기를... .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용감하게

그러나 슬퍼하지 말고

새로운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만 한다


생의 단계의 시초에는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게 하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이어지는 생의 공간을

명랑하게 지나가야 하나니


- 헤르만 헤세, <생의 계단> 부분



우리는 끝없이 ‘생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게 하는/마력이 깃들어 있다’


이성으로 스스로를 앙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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