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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다시 아이가 된다

by 고석근

노인은 다시 아이가 된다


사람은 늙을수록 점점 더 어린아이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을 느끼지 않고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 에라스무스,『우신예찬』에서



기타 강습을 하는 공부모임의 한 회원이 말했다. “노인하면 인품이 있고 뭐 그런 이미지 아니에요? 그런데 전혀 아니에요. 다들 애에요.”


머리카락 허연 노인들이 조그만 것 가지고 아웅다웅 싸운단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분들도 똑 같단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는 ‘노현자(老賢者) 원형’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옛 그림에 나오는 산신령 같은 ‘지혜로운 노인’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노인들이 지혜의 상징이었다. 거의 변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오래 산 노인들이 당연히 지혜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지혜의 상징이 되기 힘들다.


우리가 갖고 있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는 융이 말하는 원형(元型)인 것이다. 물론 현실의 노인에게서도 그런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노현자’를 온전히 일깨운 노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많은 노인들에게서는 ‘아이’가 쉽게 발견될 것이다.


헌대사회에서는 노인을 약자로 본다. 버스를 타면 노약자석이 따로 있지 않은가? 지혜를 가진 존재보다는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말했다. “사람은 늙을수록 점점 더 어린아이에 가까워집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져야 이승을 힘들지 않게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머리 중심이 아닌 몸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머리 중심으로 살면 어떻게 될까?


늙고 병들고 죽는 게 너무나 힘들 것이다. 그래서 많은 노인들이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본다.


아이가 되어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지 못한다. 고뇌에 가득 찬 인간, 이성(理性) 중심의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서글픈 노인상이다.


이런 노인들은 술을 한잔 마시면 갑자기 아이가 된다. 철없는 아이, 갑자기 훌쩍 훌쩍 운다.


노인은 이런 ‘순진한 아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순수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순수한 아이가 되려면 평소에 부단히 감성을 깨워야 한다.


품부한 감성을 지녀야 마냥 즐거운 아이가 된다. 감성이 빈약하면, 감상적이 된다. 혼자 즐겁게 놀지 못하고 어른에게 보채는 아이가 된다.


어느 문화학자는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말을 했다. 이때의 애는 감상적인 아이다.


감상적인 아이는 갑자기 개가 된다. 인간의 마음은 거의 이성이 아닌 감성이기에, 평소에 이성을 단련하기보다는 감성을 일깨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릴 적부터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미적 인간이 될 때 우리는 멋진 노인이 될 수 있다.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 기형도, <노인들> 부분



겨울을 견뎌 낸 나뭇가지들은 새로이 싹터오를 나뭇가지들을 위해 자신들의 목을 분지르며 땅으로 떨어진다.

얼마나 장엄한 풍경인가!


감당하기 벅찬 날들을 잘 견뎌낸 나뭇가지들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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