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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한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by 고석근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키치는 두 가지 감동의 눈물을 흘러내리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이 말한다.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두 번째 눈물이 말한다.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전 인류와 함께 감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두 번째 눈물만이 키치를 키치로 만든다. 모든 인간의 우애는 키치를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아주 오래 전에 ㅅ 문학회에 강의를 간 적이 있다. 한 회원 집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마당에는 야생화가 가득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회원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 다들 고개를 숙여 야생화를 바라보며 “예쁘다!”고 찬탄을 했다.


나는 화가 났다. “아니? 문학회 회원들이?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럴 수가 있는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에는 주인공인 60대 여인 미자가 자신의 외손자가 성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여중학생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들판을 걸어가다가 땅에 떨어진 살구들을 발견한다. “와!” 그녀는 살구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른다.


속으로 시상(詩想)을 떠올린다. ‘살구들은 스스로를 땅에 떨어뜨린다.’ 여중학생의 어머니를 발견하고서도, 자신의 ‘시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혼잣말을 계속한다. “여기 오다 보니까 살구들이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보셨죠?”


그녀가 외손자의 성폭행으로 죽은 여중학생의 아픔에 공감했다면, 살구들이 예뻐 보였을까?


그녀의 무의식(無意識)은 여중학생의 죽음을 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의식(意識)은 어떠했는가?


도피하고 싶은 것이다. 타조가 모래에 얼굴을 파묻듯이 현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세계’로 도망을 친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보니 땅에 떨어진 살구들이 마냥 아름다웠던 것이다.


자신들의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이 ‘키치’다. ‘짝퉁, 싸구려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키치에 대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잔디밭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전 인류와 함께 감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눈물이 키치를 만들어 낸다. 모든 인간의 우애는 키치를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우애는 키치를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진정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아픔을 직면해야 한다.

미자는 자살한 여중학생의 흔적을 쫓아간다.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이제 저 강물은 아름답지 않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저 강물을 마시고 진흙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랴? ㅅ 문학회 회원들이 평소에 자신들의 아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면, 야생화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찬탄할 수 있었을까?


위대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진정한 인류애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미자는 죽은 여중학생 단 한명을 사랑하게 되어 시를 쓰게 되었다.


시만 남기고 사라진 미자, 영화는 미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강물에, 강물 위에 반짝이는 햇살에, 강물 위를 불러가는 바람결에 그녀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에서 ‘미자’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생(生)은 키치가 되어 흘러갈 것이다.



부엌 창 앞에 서서

쏟아지는 물 잠그지도 못한 채 서서

두 손 떨군 채 낮고 작은 창 내다보다

핑 눈물이 도네

노란 봄 스웨터 환한 색깔옷들 아무리 가져다 입어도

낡은 겨울 검정 외투처럼

스스로 무겁고 초라해서


- 김경미, <어떤 날에는> 부분



우리가 ‘어떤 날에는’ 우리의 삶이 키치임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것.


이렇게 가끔 의례를 행하며, 우리는 키치의 마법의 나라에서 풀려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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