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누구나 죽을 때는 도(道)를 깨치게 된다고 한다.
죽는 순간,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허물어져가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 자신이 서서히 녹아 없어져가며 허공 속으로 흡수되어가는 순간, 문득 자신이 이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이자 우주 그 자체임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아, 얼마나 나는 자그마한 것들에 분노하며 하잘 것 없게 살았던가!’ 그는 이제 성자처럼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생전에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지상낙원이 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지금 아비규환의 생지옥에 산다. 뉴스 보기가 두렵고 인터넷 열기가 두렵다. 막장까지 간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막장에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직 막장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그들은 막장에서 비명 지르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정신이 없다.
예술가는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들이라고 한다. 잠수함이 물속에 너무 오래 있으면 산소가 희박해진다.
둔감한 사람들은 태평해하지만 민감한 토끼는 숨을 헐떡거리게 된다. 사람들은 토끼를 보고 잠수함을 물 위로 올라가게 했다고 한다.
현대 예술이 괴기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은 이 세상이 고통스럽고 괴기스럽기 때문이다.
왜 좀 더 위안을 주는 예술이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예술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술은 결코 위안을 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견딜 수 없이 불편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비명 지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위안을 주는 것들은 많다. 온갖 드링크 종류, 마약류들은 넘치도록 많다. TV, 영화, 드라마, 책 속의 따스한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교회, 사찰, 상담실에서도 우리는 온갖 위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산소가 부족해지는 잠수함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토끼의 숨넘어가는 헐떡거림이지 따스한 위안의 말이 아니다.
서로가 곧 이해했던 것은
다만 수렁 속에 같이 있을 때뿐이었다.
- 하이네,《그들은 나를》부분
사람은 누구나 수렁 속에 같이 있을 때는 동지가 된다. 서로를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지금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의 수렁에 함께 빠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드링크 종류를 너무 많이 마셔 이 긴박한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밤거리엔 여전히 사람들이 흥청댄다.
‘좋은 시’ ‘좋은 소설’ ‘좋은 동화’ ‘좋은 에세이’ ‘좋은 영화’ ‘좋은 미술’ ‘좋은 음악’ ‘좋은 연극’...... 은 우리를 막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죽음의 밑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산산조각 나는 임사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