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에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는 이상주의자다. 그래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항상 꿈을 꾸었다. 어릴 적에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슨 결정을 할 때는 부모형제가 최우선이었다. 그러다 꿈이 바뀌었다.
좋은 세상이었다. 시민단체와 지역신문사에서 활동하며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나는 돈키호테였다.
그러다 나이 50이 넘어서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는 괴테의 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었다. 눈앞을 가리는 안개였다. 한때 사회과학에 심취했던 나, 강철 같은 신념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끌렸지만, 그 모든 강함은 쉽게 부러졌다.
노자는 말했다.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돈키호테다. 하지만 이제 나의 꿈은 내 안의 영원한 푸른 생명의 나무다.
밀란 쿤데라의 ‘키치’가 나의 전 인생을 되돌아보게 했다. 키치는 우리의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아이들은 바람처럼 뛰어 논다. 얼마나 가벼운가! 하지만 어느 누가 그들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가?
아이들을 바라보면 마냥 즐겁다. 우리도 함께 가벼워진다. 우리는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다.
하지만 다시 어른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다. 바로 키치 때문이다.
키치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에 의해 생겨난다. 우리는 어떤 확고한 기준이 있다.
그 기준으로 바라보니,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세상에는 원래 선악(善惡), 미추(美醜), 귀천(貴賤)... 등 가치 기준이 없었다. 그런데 인간이 정해 놓았다.
그 기준을 세상에 적용하면 키치가 된다.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에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키치의 마법에 걸려들면 우리는 어떤 강고한 기준으로 사람과 사물을 대하게 된다.
서현역에서 13명의 사상자를 낸 범인은 말했다. “나를 해하려는 스토킹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이를 통해 스토킹 집단을 세상에 알리려고 범행했다.”
그는 전혀 폭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해하려는 스토킹 집단을 응징하고 이 집단을 세상이 알리게 위한 ‘정의를 실현’한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가! 신념의 명쾌함이. 모든 사랑과 정의는 강한 신념에서 출발한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수한 히틀러들이 계속 부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범인처럼 많은 사람을 해하지는 않았지만, 그 범인처럼 사고하고 있다. 어떤 확고한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사고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강한 신념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이런 사고가 키치를 낳는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사람들을 혐오하고 어떤 생각들을 경멸한다.
얼마나 하찮은 싸구려 생각들인가? 이런 생각들이 낳은 예술품, 물건들이 키치다. 이 세상은 늘 키치로 반짝이고 있다.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많은 경우가 키치다. 값싼 싸구려 말들이 난무한다. 교양과 예의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제 키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 푸른 생명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생명의 나무도 이 세상에서는 키치로 볼 것이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빛(지혜)을 누그러뜨리고 먼지 같은 세상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푸른 생명의 나무를 가슴에 품고 이 세상의 티끌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함께 푸른 생명의 나무가 되어가야 한다.
독야청청(獨也靑靑)하겠다며 고립되어 살아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키치가 되어버린다.
내 이마에 자란 한 그루 나무,
내 안으로 자랐다.
뿌리는 혈관,
신경은 가지,
어수선한 나뭇잎은 사유.
- 옥타비오 파스, <내 안의 나무> 부분
시인의 이마에서는 이성의 빛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그 나무는 안으로 자랐다. 온 몸이 나무가 되었다.
그의 시들은 어수선한 나뭇잎의 소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