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 그게 인생이야.
- 무라카미 하루키,『상실의 시대』에서
가끔 공부모임에 처음 오시는 분들은 인사말을 할 때 말한다. “힐링하고 싶어서 왔어요.”
언젠가부터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힐링은 치유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화가 난다.
‘왜 이 시대는 사람을 환자로 만드는 거야?’ 최근에 병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나는 힐링이라는 말에 담긴 이 시대의 교묘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두렵다.
어느 시대나 인간을 뭔가 부족한 존재, 치유해야 할 존재로 봤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낮게 보는데 익숙하다.
남에게 경멸을 당하는 사람은 그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다.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도 경멸을 당하지 않는다.
자신을 뭔가 부족하고 치유해야 할 사람으로 보게 되면 남들이 경멸한다. 경멸을 당하게 되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
나는 힐링을 위해 오시는 분들에게 말한다. “사는 게 힘들어 힐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사람은 힐링이 필요 없어요. 힐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허상이에요.”
인류의 스승들을 보자. 4대 성인들은 인간의 위대함을 가르쳤다. 예수는 인간 안에 신성이, 석가는 불성이, 공자는 본성이, 소크라테스는 로고스(이성)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이 내면의 힘을 키우면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인문학 공부를 힐링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환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문학은 우리 안의 위대한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 힘이 커지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위대한 존재가 된다.
힐링을 위해 인문학 공부를 하게 되면, 자신의 내면의 힘을 키울 생각보다는 좋은 약(강의, 책)을 찾아 나서게 된다.
좋은 강의, 좋은 책을 만나면 잠시 마음이 평온해 질 것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은 파도를 치고 다시 더 좋은 강의, 더 좋은 책을 찾아 고된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일본의 현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 그게 인생이야.’
신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나는 거대한 물살을 따라 흘러가는 작디작은 물방울 같은 존재야!’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망연히 바라본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안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
여기서 삶의 태도는 두 개로 갈라진다. ‘인생 별거 있어? 적당히 쾌락을 즐기고 힐링하며 살아가는 거지!’와
‘사는 게 아무리 무의미하게 보여도 나의 인생을 뜨겁게 사랑할 거야!’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운명애). 자신의 모든 삶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내면에서 희열이 올라온다.
인간의 내면에는 어떤 고난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온전한 인간이야! 환자가 아니야!”
힐링을 거부하는 인간이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자신을 초극해가는 인간이다. 인문학은 힐링을 넘어 자기 초극의 길을 가르쳐준다.
어제 ㅅ 주막에서 공부모임을 했다. 다른 손님들도 많이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대화에 몰입했다.
우리의 목소리로 꽃을 피웠다. 뜨거운 열기, 다들 벅차오르는 내면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은
바다와 같은 깊이를 안고 있기에 침묵할 줄 알고
땅과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있기에 소리칠 줄 알고
하늘과 같은 높이를 갖고 있기에 노래 부를 줄 안다
- 마하트마 간디, <침묵과 소리와 노래> 부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바다와 같은 깊이를 안고, 땅과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하늘과 같은 높이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은 소우주(小宇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