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산다는 것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가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 다비드 르 브르통,『걷기예찬』에서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죽기 직전 하인이 건넨 포도주 한잔을 마시고는 “좋다”라고 했단다.
나는 대학 시절에 이 말을 듣고는 책을 살 때마다 뒤표지 앞 쪽에 ‘좋다’의 독일의 말 ‘es ist gut’을 정성스레 써놓았다.
나는 생각했다. ‘역시 위대한 철학자라 한 생(生)을 마치면서 자신의 삶이 좋았다고 했구나!’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내가 그 말을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칸트가 포도주 한 잔 마시고 ‘좋다’라고 한 것은 그 순간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좋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인간은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터이다.
칸트는 항상 오후 세시 반에 산책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걸으면 앉아 있을 때 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고, 책으로도 얻지 못하는 무언가를 가득 채워주며 버릴 것은 버리게 해준다.’
걸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은 ‘몸의 사유’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 예찬’을 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걷기는 몸으로 사는 것이다. 몸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오롯이 ‘현재’를 누리게 된다. 찰나가 영원이 된다.
나는 머리로 철학을 이해하려 했기에 칸트의 ‘es ist gut’을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몸으로 공부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몸으로 알고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칸트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며, 찰나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마음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포도주 한 잔 마시고서 한결 같을 수 있었던 것이다. ‘es ist gut’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 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 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부분
시인은 ‘자명한 산책’을 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우리 안의 고양이,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 영혼. 그 영혼은 우리가 몸으로 살아갈 때 반짝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