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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얼굴

by 고석근

행복의 얼굴


지복(至福)은 덕(德)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그리고 우리는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 바뤼흐 스피노자,『에티카』에서



나이가 들어가며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최근에 얻게 된 작은 깨달음.


‘몸으로 살아가면 된다!’


나는 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안다. 몸이 건강할 때는 당연히 죽음을 회피한다.

몸의 생명 에너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어 힘이 빠지게 되면, 몸은 알아서 죽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요즘 나의 삶의 신조는 ‘몸으로 살자!’다.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죽음을 모르기에, 살아 있는 동안 신나게 산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예상하기에 사는 게 신이 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사형수이기 때문이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형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살아 있음’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은 마냥 행복하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살아 있음의 환희다.


BBC 방송 기자가 심층심리학자 칼 융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신을 믿으십니까?”


그러자 융은 천천히 대답했다고 한다.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신을 압니다.”


그렇다. 신은 믿는 게 아니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몸으로 직접 겪어봐야 하는 것이다. 몸으로 신을 만나게 되면, 삶이 신나게 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몸으로 신을 만날 수 있을까? 아이들처럼 ‘생(生)의 의지’를 다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에서 솟아올라오는 생명의 에너지가 샘물처럼 분출하는 삶을 살다보면, 어느 날 신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신을 자명(自明)하게 알게 될 것이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복(至福)은 덕(德)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한다. 그럼 인간의 지극한 행복, 지복(至福)은 언제 올까?


스피노자는 지복은 ‘덕 자체’라고 말한다. 덕은 도에 맞는 삶을 말한다. 천지자연의 이치(道)에 맞는 삶이 덕이다.


인간이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게 살아갈 때, 자연스레 지극한 행복이 온다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는 삶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머리는 자신의 생각에 빠지기 쉽다.


머리로 하는 생각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쉽다. 머리의 생각들을 비워야 한다.


생각을 비운 몸은 천지자연 그 자체다. 자연스레 도에 맞는 삶, 덕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머리의 생각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면, 죽음을 앞 둔 사형수가 되어 고된 삶을 견디기 위해 쾌락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쾌락에 중독된 삶을 살아가거나, 아예 쾌락을 멀리하는 무욕(無慾)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양극단의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성(聖)과 속(俗)으로 나눠지는 삶은, 어떤 허상으로 도피하는 삶이다.


우리는 머리를 비우고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이의 얼굴, 행복의 얼굴로 살아가야 한다.



마음의 문

활짝 열면

행복은

천 개의 얼굴로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 이해인, <행복의 얼굴> 부분



온 몸으로 살아가게 되면, 머리에 갇혀있던 마음이 스스로 문을 활짝 열게 된다.


우리는 천 개의 행복의 얼굴이 된다.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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