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우리의 내면에 있다
자기 자신에게서 답을 찾아봐, 해답은 거기에 있더라고.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왕자』에서
우리가 배운 공부는 ‘밖을 향해 공부한 것들’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공부의 재료였다.
물질의 이치를 배우는 물리학, 생물의 이치를 배우는 생물학, 사회의 이치를 배우는 사회학... .
언뜻 생각하면 이 세상의 물질은 이치에 따라 움직이니, 물질의 이치를 배우는 게 당연한 듯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물질의 이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할까? 현대양자물리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을 부정한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 물질도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원시인에게는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비행기에게 어떤 이치가 있을까? 현대양자물리학에서는 관찰자 효과를 얘기한다.
물질은 우기가 볼(관찰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의 객관적인 이치는 없다.
우리 눈에 분명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물질들은 다 우리 마음이 밖에 투사된 것들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밖에 진리, 진정한 이치가 있다는 믿음으로 ‘객관적인 세계’를 공부해 왔다.
우리는 그것들을 알아가는 주체가 되었다. 이렇게 공부하게 되면, 공부가 우리의 마음을 고양시켜 주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마음은 충만해지지 않는다. 한평생 온갖 지식을 쌓은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는 삶의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려 한다.
그는 부활절 행사의 종소리를 듣고 자살을 멈춘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부활의 의지가 솟아났을 것이다.
우리는 지식을 쌓는 공부를 멈춰야 한다. 이제 자신의 마음을 공부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이 세상은 사실 우리의 마음이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 본성(本性), 본래의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은 천지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이 세상의 이치 그 자체다.
그러다 자라나면서 자아(自我)가 생겨난다. 자아는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나’라는 마음이다.
이 자아의 마음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이 자아의 마음으로 공부해 왔다. 자아만 풍선처럼 팽창했다. 과도하게 팽창한 자아는 오만하고 어리석다.
우리에게는 파우스트의 고뇌가 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공부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이 세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 세상의 좋은 부품이 되려는 공부를 해 왔다.
망상이다. 이렇게 허상을 쫓는 삶을 살아가면 삶이 허망해진다. 우리는 각자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자아 중심의 삶에서 본성 중심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대 몸 속 깊숙한 곳이 바로 꽃밭이리니
천 개의 연꽃잎 위에 고이 앉아 영원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라.
- 까비르, <영원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라> 부분
우리는 객관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서 꽃밭을 찾아야 한다. ‘천 개의 연꽃잎 위에 고이 앉아 영원한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