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살자

by 고석근

온몸으로 살자


지리학자는 한가로이 돌아다닐 수가 없어. 서재에서 탐험가를 만나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그들의 기억을 책에다 기록하는 거야. 넌 탐험가지? 너의 별을 이야기해다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왕자』에서



이솔희 감독의 영화 ‘비닐하우스’를 보았다. 한 여성의 끔찍한 가족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허허벌판의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 문정은 아들과 함께 살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 위해 간병인 일을 한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부부의 부인 화옥을 목욕시켜 주려다가 실랑이를 벌이게 되고 화옥은 머리가 욕실 바닥에 부딪쳐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신고하려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문정은 화옥을 이불로 둘둘 말아 차에 싣고 비닐하우스 장롱에 숨겨 놓는다.


그 후 문정은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한 친정 어머니 춘화를 데려와 함께 살아간다.


시각 장애인인 남편 태강은 어느 날, 춘화의 얼굴을 만져보다 아내가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의사인 친구를 부르고 친구가 춘화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문정이 나타나 춘화를 샤워해야 한다며 욕실로 데려간다.


치매가 진행되고 있는 태강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아내가 맞겠지’ 믿어 버린다.


평소에 서재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태강, 그는 한평생을 ‘머리’를 쓰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는 ‘어린왕자’에 나오는 지리학자다. 지리학자는 탐험가의 이야기를 모아 지식으로 정리한다.


그가 익히는 지식들은 그가 온몸으로 익힌 것들이 아니다. 그런 지식들은 삶의 지혜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모두 지리학자가 아닌가? 서재에 앉아 언제나 교양 있게 얘기하는 태강은 우리의 자화상이다.


태강은 비상 상황에서 전혀 대처를 하지 못한다. 아내가 바뀌었으면 진짜 아내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중국 역사 드라마를 보면, 건국 황제들은 모두 몸을 쓰며 산 사람들이다. 그들은 임기응변에 능하다.


그들의 몸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반면에 패배한 상대방 귀족 출신들은 몸이 굳어 있다.


예의와 교양에 묶여 있다. 일상에서는 기품있게 행동하지만, 비상 상황에서는 망연자실하게 된다.


태강은 치매가 더 진행되기 전에,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할 생각을 한다. 이 얼마나 나약한 생각인가!

그게 품위 있는 삶인가! 우리의 몸은 끝까지 생(生)의 의지로 불타오른다. 머릿속의 생각은 쉽게 좌절한다.

우리는 온몸으로 살아야 한다. 온몸으로 살아온 문정은 뒤틀린 사랑이지만, 끝까지 가족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평소에 머리를 쓰며 살아온 태강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신마저 지키지 못하는 그는?


이혼하려고 벌써 세 번째 법정으로

나가는 우리 아랫집

젊은 부부

오토바이 위의 암수 매미처럼

서로 분간 못하게 몸 찰싹 붙이고


- 김윤희, <이혼> 부분



이혼하려고 법정으로 가면서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젊은 부부.


건강한 모습이 아닌가? 한때 사랑했던 부부, 어떤 이유로 헤어지지만, 서로 최선을 다하는 가난한 젊은 부부.

두 사람 다 몸을 쓰며 살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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