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善惡)을 넘어서

by 고석근

선악(善惡)을 넘어서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는 다른 모든 별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풀과 나쁜 풀이 있었다. 따라서 좋은 풀들의 좋은 씨들과 나쁜 풀들의 나쁜 씨들이 있었다. 그러나 씨앗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땅속 깊이 숨어 잠들어 있다가 그중 하나가 문득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TV 드라마 ‘신성한, 이혼’에는 늙은 어머니와 아직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어른 아들’이 나온다.


그 아들의 아내는 어떻겠는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녀 사이에 끼어 옴싹달싹 못하는 한 여인은?


그 여인은 항상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가야 한다. 그야말로 남의 편인 남편과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


나도 그랬다. 아내와 결혼할 때 딱 하나 약속해달라고 했다. “자기야, 우리 엄마 눈물 흘리게 하면 안 돼!”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바로 ‘마마보이’였구나! 나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고통’을 보아왔다.


노름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우리 네 형제를 기르며 자주 앓아 누우셨다.


큰 아들인 나는 당연히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엄마를 지켜야 해!’ 나는 빨리 어른이 되기를 기도했다.


이제 다 커서 엄마를 보호할 수 있을 때, 나는 자연스레 아내에게 ‘효녀 며느리’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선(善)과 악(惡)은 이렇게 한 인간의 인격에 형성된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집착하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눠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 깊이 선과 악의 씨앗들이 심어지고, 그 씨앗들은 언제고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씨앗의 싹을 틔울 것이냐는 아이의 마음에 달렸다. ‘아이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


아이가 항상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삼라만상은 어머니를 기준으로 둘로 나눠진다. 어머니에게 좋은 것은 선, 나쁜 것은 악.


아이는 자라면서 다른 곳을 불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을 기준으로 삼라만상은 다시 둘로 나눠진다.


한번 선악의 씨앗들이 마음 깊이 심어지면, 그 씨앗들은 우리 마음의 빛이 내리쬘 때 반짝 눈을 뜬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별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별을 한순간에 다 덮어 버릴 수 있는 어린 왕자의 별에 사는 ‘바오밥 나무’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원래 우리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없었다. 어느 한 곳에 잡착하다 보니, 선과 악이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에 생겨난 것은 밖으로 비친다. 밖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된다. 우리 눈에 선명하게 보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한다. 고요한 마음은 선과 악을 다 품고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이 생겨난다. 목이 마를 때는 물은 선이다. 하지만 홍수가 나면 물은 악이다.

선과 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상황이 선과 악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지금, 여기’에 집중하여 살아가야 한다.



태양이 우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꿈과 같이

단조의 음향 하나가 나뭇가지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온 숨구멍이

아침 기력의 좋은 향기로 가득 차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겨울 아침> 부분



우리의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면 이 세상은 언제나 눈부신 황금 꽃밭이다.


우리의 마음이 조금만 ‘지금, 여기’를 벗어나게 되면, 이 세상은 선과 악으로 갈라진다.


이 세상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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