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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Dec 13. 2023

청렴에 대하여   

 청렴에 대하여     


 왕은 계속했다. “권위는 무엇보다도 이성에 근거를 두는 법이니라. 네가 만일 네 백성에게 물에 빠져 죽으라고 명령을 한다면 그들은 혁명을 일으키리라.”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어린 왕자』에서          



 강의 다녀오는 길에, 가끔 ㅇ 외식 프랜차이즈에 들러 ㅎ 도시락을 샀다. 그런데 그저께는 그 평범한 즐거움이 무너져버렸다.     


 평소처럼 들어갔는데, 점원이 “오늘은 주문이 많아 안 되겠습니다.”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점원은 높이 쌓여 있는 도시락들을 보여주었다. ‘헉!’ 이런 날도 있구나. 할 수 없이 되돌아 나왔다.     


 나는 그 점원의 무표정한 얼굴 표정을 떠올렸다. 그녀가 고객에게 그렇게 로봇처럼 대해야 했을까?        


 어떻게 해서든지 고객의 주문을 받아주려 노력을 했어야 하지 않나? 내가 주문이 많이 들어 온 메뉴로 바꾸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람을 로봇처럼 대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숨이 막혀온다. 특히 어떤 단체,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다.       

 친절하게 말을 하는 듯하지만, 기계음이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혼자 연극 대사를 외는 것 같다. 평소처럼 말하면 쉽게 알아들을 텐데,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     


 한때 ‘나는 인간이 아니므니다’ 하는 개그의 대사가 인기가 있었다. 인간이 아닌 사람들을 너무나 자주 만나다 보니, 그 대사가 크게 공감이 되었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목민심서’에서 가장 중요한 목민관의 정신자세로 ‘청렴’을 든다.     


 ‘청렴이란 목자의 본무요 갖가지 선행의 원칙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관이 될 수는 절대로 없다.’      


 청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간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삶이 있을까?     


 하지만 청렴, 그 자체로 보면, 저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최고 청렴하다. 저 돌멩이는 단 한 번도 부정을 저지른 적이 없다.     


 남들이 자신을 아무리 짓밟더라도 자신의 본분을 지켰다. 우리가 이런 돌멩이를 본보기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가?     


 죄없이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잘 사는 것이다. 부족한 인간들이 모여 함께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정약용은 말했다. “그러나 꿋꿋한 행동이나 각박한 행정은 인정에 맞지 않으니 속이 트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정(人情), 사람의 정이다. 청렴이 인정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꿋꿋한 행동이나 각박한 행정’을 하면서 청렴한 공무원, 바람직한가?     


 저 돌멩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차라리 그런 사람을 공무원으로 임명할 바에는 AI가 낫다.     


 앞으로 많은 직업들이 AI로 대체될 것이라고 한다. 그럼 ㅇ 외식 프랜차이즈의 점원도 AI로 교체되어야 할까?     

 요즘 카페나 식당에 가 보면, 기계가 주문을 받는다. 기계는 얼마나 공정하고 청렴한가!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기계들 앞에서 절망하는가! 우리는 ‘청렴하면서도 인정이 많은 탁 트인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말하는 그런 목민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의 복잡미묘한 상황에서 기계적인 청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린 왕자가 만난 왕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위는 무엇보다도 이성에 근거를 두는 법이니라.”        


 우리가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理性), 이치를 아는 인간의 타고난 마음을 믿는다는 것이다. 


          

 방대한 

 공해 속을 걷자      


 - 김종삼, <걷자> 부분            



 인디언들은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벌판을 걷다가 화가 풀리면 되돌아왔다고 한다.     


 시인도 화가 났나 보다. ‘방대한/ 공해 속을 걷자’      


 하지만 시인은 어디까지 걸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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