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을 위하여
아프리카 인들이 뱀을 섬기는 이유도 이와 같다. 온몸을 땅에 붙이고 사는 뱀들이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뱀은 늘 어머니의 대지와 접촉하면서 배로, 꼬리로,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알아낸다. 조르바도 이와 같다. 우리처럼 교육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어제 공부 모임에서 연구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다 퇴직한 분이 말했다. “지나간 세월이 휙 지나갔어요.”
“그래도 여러 인문학 저서들을 열심히 읽었는데요. 인생을 헛살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 자신으로 살지 않아서 그렇겠죠?” 그분은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이 해결책이 찾아낼 수 있을까?
고대 중국의 현자 장자는 말했다. “삶은 살아야 하는 신비이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분은 한평생 삶의 문제를 풀면서 살아왔다. ‘삶의 신비’를 느낀 적이 얼마나 있을까?
머리에 가득한 지식으로 살아온 인생, 머릿속의 지식이 인생의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조르바’를 만나야 한다. 조르바의 손을 굳게 잡고, 허공에 동둥 떠 있는 몸을 땅으로 내려오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온몸을 땅에 붙이고 살아가는 뱀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머니의 대지와 접촉하면서 배로, 꼬리로,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몸에 배인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부활할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그가 간절히 원하면, 조만간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인간은 이 세상을 두 개의 눈으로 본다. 하나는 추론이고 다른 하나는 직관, 통찰이다.
오랫동안 지식 위주의 공부를 한 사람은 추론의 눈은 밝아지고 직관의 눈은 퇴화하게 된다.
추론의 눈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은 다 물질로 보인다. 물질의 인과관계만 보인다.
물질을 넘어 텅 빈 허공은 보이지 않는다. 물질을 낳는 무한한 신비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사는 게 신명이 나지 않는다. 딱딱한 물질에 둘러싸인 삶, 항상 숨이 턱턱 막혀 온다.
우리는 직관력을 길러야 한다. 마음과 몸을 풀어야 한다. 우리는 에너지의 파동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에너지의 파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딱딱한 물질의 성벽을 부수게 된다.
널리 널리 퍼져가게 된다. 우리는 파동 속에서 노닐어야 한다. 이때 삶의 신비가 춤추게 된다.
‘안다는 것’은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추론으로 아는 것을 아는 것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다.
우리는 앎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겉모습만 아는 추론의 지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물이여, 한순간의 덧없는 네 이름을 부르기에
내 구강 구조는 부족하기 짝이 없구나.
모든 모음을 한꺼번에 발음하며
모든 언어로 동시에 불러야만 하기에.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물> 부분
우리가 물을 보며, 물이라고 하는 순간, 물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앙상한 물의 잔해만 늘브러져 있다. 우리의 말은 사물을 죽인다.
‘모든 모음을 한꺼번에 발음하며/ 모든 언어로 동시에 불러야만’ 한다.
이때 비로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