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by 고석근

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덕행(德行)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전 인간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이고,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말려들었을 뿐이지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길을 가던 여우가 몹시 배가 고팠다. 다행히 길가에 포도나무가 있었다. 여우는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포도송이들을 향해 높이 뛰었다.


그런데, 아무리 높이 뛰어도 포도송이에 손이 닿지 않았다. 여우는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여우는 중얼거렸다. “저 포도들은 덜 익어서 아주 실 것 같아. 나는 신 포도를 아주 싫어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다. 그 후, 여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우는 계속 자신을 속여야 했을 것이다.


‘먹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 정신이 가장 중요하지.’ 이렇게 고상한 생각을 하며 뱃속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를 견뎌냈을 것이다.


‘정신승리법’이다. 인간에게는 정신이라는 게 있다. 다른 동물들은 정신이 없다. 의식이 있을 뿐이다.


진짜 여우는 인간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에서 ‘생각하는 동물(호모 사피엔스)’로 진화를 했다.


생각은 무한히 발전하게 된다.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게 된다.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쉽게 망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일찍 태어나 엄마 품에서 자란다.


1년 동안은 엄마 자궁 속에 있을 때와 같다. 가만히 누워서 엄마가 다 챙겨주어야 한다.


‘배가 고파’하고 옹알거리면, 엄마가 젖을 준다. ‘오줌을 쌌어’하고 옹알거리면,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준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아기는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의식 깊이 박혀 있는 이 생각은 일생동안 지속된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그대로 될 것 같은 망상 속에 살아가게 된다.


이 망상은 완장을 차게 되면 금방 현실이 된다. 사이비 교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잘나갈 때가 가장 위험하다.


카잔차키스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 부류는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다.


첫째 부류는 속물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망상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치열하게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문제는 두 번째 부류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덕행(德行)을 독려’한다.


언뜻 보면,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만한 인품과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고상한 인품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하면? 결국에는 ‘나는 신이다’라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이솝 우화 속의 여우처럼 자신을 속이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나를 몰라 주는 거야! 누가 뭐래도 나의 길을 갈 거야!’


인류 역사에 출현한 크고 작은 수많은 독재자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세상을 위해’ 살았다.


우리는 세 번째 부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전 인간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다.


온몸으로 자신을 밀고 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평생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을 하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결국에는 다른 사람과 세상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스스로 불타는 태양이 만물을 살리듯이.


우리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전 인간의 삶’을 치열하게 밀고 가야 한다.


이 세상의 이치는 자타불이(自他不二)다. 나의 이익과 남의 이익은 하나다. 어느 한쪽을 택하게 되면 둘 다 잃게 된다.



나는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지

나는 누구 아닌 나한테서 가장 오해받으며 살고 있지.


- 유안진, <무> 부분



시인은 무를 보며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본다.


무성한 잎의 채소였다가 결국에는 ‘모가지도 몸뚱이도 오그라들고 옴추려 들다가’ 하얀 뿌리만 남은 자신을.

몸뚱이 하나만 남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인의 영혼은 우주를 다 담고 있으리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생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