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나

by 고석근

두 개의 나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미하다. - 서경(書經)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울부짖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울부짖을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몸뚱이를 가졌기에 고통 앞에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으로 지상에 왔기에 예수도 인간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로 살아가다 불을 발견하게 되면서 동물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고기를 익혀 먹으면서 뇌가 커진 것이다.


뇌가 커지면 기억이 오래간다. 인간은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면서 자의식이 생겨났다.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자아(自我)’가 생겨난 것이다.


이 자아가 인심(人心)이다. 사람으로 진화하며 생겨난 ‘나’라는 의식, 이 자아는 자신의 몸뚱이를 최고 중시 여긴다. 그래서 위태롭다. 남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자아가 우리 안의 동물성과 만나면 그야말로 자신만 생각하는 동물이 되어 그 어떤 동물보다도 잔악하게 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다른 존재와 공감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마음이 되어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 공감력이 인간의 본성이다. 사랑이다. 이 본성은 도심(道心)이다. 우리의 이 본성에 우리의 진짜 나, 참나(眞我)가 있다.


하지만 도심은 미미하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늘 위태롭다. 이 도심을 잘 기를 때 인간은 무한히 아름다워진다. 신처럼 위대해진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예수는 도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다른 생명체들은 본능적으로 삼라만상의 하나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나’라는 의식이 있어, 삼라만상 속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홀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한다.


이런 착각, 망상에 한 번 빠지면 인간은 극악한 이기주의자가 되어 다른 존재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구 착취하고 학살하게 된다.


자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코로나 19는 자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아가 도심, 참나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코로나 19는 점점 더 무서운 악마로 변신해 갈 것이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윤동주,《또 다른 고향》부분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시인은 눈물 짓는다. 누가 우는 걸까? 백골일까? 아름다운 혼일까?


하지만 갈등하는 시인을 지조 높은 개가 쫓는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시인은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간다. 일제강점기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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