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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Feb 18. 2024

나는 내가 무겁다   

 나는 내가 무겁다      


 재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방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유산이 3천만 원이면 웃으며 나눠요. 3억이면 싸워요. 30억이면 소송을 하지요.’      


 부모의 유산이 적어야 형제자매의 우애가 보존된단다. 많으면 법적인 싸움까지 하여 남보다 더 나쁜 사이가 되고.     


 ‘아니? 많아야 좋은 것 아냐?’ 물욕에 젖은 현대인에게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이 아닌가?     


 인간은 한없이 어리석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잃어가면서 끝없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선비 남명 조식은 ‘신명사도(神明舍圖)’를 통해 진정한 이익을 얻는 법을 보여 준다.        

 신명사도는 신명이 사는 집을 그린 것이다. 신명(神明)은 천지신명, 천지의 신령을 말한다.       


 신명사도에는 이 신명이 태일군(太一君)으로 표현된다. 태일(太一)은 우주의 근원이 도(道)를 말한다.


 인간도 소우주라 태일군, 도의 주재자가 우리 안에 있다. 태일군은 심층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하는 자기(Self)다.      


 신명사도에는 태일군을 모시는 총재(冢宰)가 있다. 총재는 백관을 통솔하는 재상을 말한다.      


 총재는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Ego)다. 총재가 모든 관료의 우두머리이지만, 왕에게 절대복종해야 하듯이, 자아는 자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조식은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나 자신을 경영하는 것이나 근본적인 원리는 같다고 본 것이다.     


 30억이라는 거금이 유산으로 남겨졌으면, 형제자매가 춤을 추며 유산을 알맞게 나눌 수 있는데, 왜 그들은 원수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들의 자아가 자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그렇다. 재상이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정치를 하면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로 진화하면서, 자신에 대한 의식(자의식)이 생겨나고 ‘나’라는 자아가 생겨났다.     


 이 자아는 쉽게 팽창한다. 쉽게 오만방자해진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 자아를 무한히 부풀게 한다.     


 황금만능사회에서 자아는 물욕에 젖을 수밖에 없다. 그의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 않고 돈 세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눈과 귀가 돈에 홀린 현대인은 자기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 왕의 명령을 전혀 듣지 않는 재상이 통치하는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동물은 본능으로 살아가기에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게 살아간다. 하지만 자아가 무한히 팽창한 현대인은 한없이 어리석게 살아간다.     


 30억이라는 유산을 받으면 춤을 추며 형제자매가 나누면 될 텐데(자기는 가장 알맞게 나누는 법을 잘 안다), 어리석은 자아는 손해 볼 짓만 한다.                     


 현대인은 신음한다. ‘나는 내가 무겁다.’ 현대인은 자신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과 남을 해치게 된다.       


 자아는 불행해져야 비로소 사는 게 즐겁다. 유산이 아예 없거나 3천만 원만 있어야 서로 행복하다.     


 우리는 모두 조르바가 말하는 ‘재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아가 갖는 확신, 그 확신은 우리의 영혼을 덮치게 되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김종삼, <어부> 부분          



 시인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살아가는 어부를 본다.     


 그는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는 이치를 안다.     


 그는 한평생 그의 내면에 있는 자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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