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화가 무서워

월요일 오후 벨이 울린다.

by 빛해랑

대학을 졸업한 둘째 딸아이가 1년의 방황을 끝내고 인턴을 시작한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지방에 숙소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두 곳에서의 기회를 받았지만 한 곳은 서울 또 한 곳은 충북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일주일 가까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지방이었다.

"딸아 엄마 생각엔 출퇴근 가능한 곳이 좋을 것 같은데?" 딸아이는 "내가 좀 더 하고 싶은 직무를 해야겠어" 하더니 출근 이틀을 남겨놓고 부랴부랴 충북 오송에 내려가 입주 가능한 방을 찾았다 , 다행히 거리는 좀 있지만 방을 구할 수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구한 방이라 부실한 곳은 없는지, 물은 잘 나오는지, 살피게 된다. 가져간 캐리어에서 물건을 꺼내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정리해 주자니 기분이 묘하다. 서글픈 것도 같고 백수 생활 청산의 기회인가 싶어 좋은 것도 같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딸아이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영 낯설어한다. 집에서 늘 그런 것처럼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본다. 들여다보니 KTX 주말표를 알아보고 있다. 하... 딸아 정신 좀 차리자. 가라앉아가는 분위기를 띄워야겠다 싶어 " 배고프다 짜장면 먹으러 가자" " 이사는 짜장면이쥐" 눈치 빠른 남편이 거든다. "이 동네 맛집을 한번 뽀사 볼까나" 그제야 딸아이 얼굴에도 웃음이 번진다. 생명과학 단지를 차로 한 바퀴 돌아보고 음식점을 검색해서 간 곳은 샤부샤부 집이었다. 오송은 생각보다 작고 아담한 도시다. 맛집은 아닌 걸로... 다이소에 들러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챙겨서 넣어주고 바쁘게 돌아와야 했다. 26년 인생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이가 마음 쓰여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 하루가 지난 월요일 오후 벨이 울린다. 딸이다. 전화기 너머로 펑펑 운다. 꺽꺽대는 소리에 말이 나오지 않는지 말도 못 한다. 진정하고 몇 시간 후에 다시 통화하자 하고 끊었다. 마음이 복잡해지며 혼란스럽다. 나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애써 참는다. "나라도 정신 차리자"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곧 다시 걸려올 전화에 대비하려 머리를 굴린다.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 "라고 할게 뻔하다. "어떤 말로 달래서 마음을 돌려놓아야 하나?" "상처받지 않고 에너지를 전달해줘야 하는데" 혼자서 열심히 시나리오 대본을 쓰는 사이 벨이 울린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침착을 가장한 목소리에 떨림을 감출 수가 없다. " 응 딸 괜찮아?" "진정 좀 됐어?" "엄마 진짜 이건 아니라고 봐"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다. "왜~ 문제가 있어?" "내가 생각한 거랑은 완전히 다른 내용을 배운대" 이럴 거면 난 안 왔지" "원래 가려던 곳 다시 갈 수 있나 알아봐야겠어" "엄마 말 들었어야 했는데"


한 시간이 넘게 통화하면서 어르고 달래고 진이 다 빠졌다. 밥 먹을 힘도 없이 망연자실 앉아 있으니 남편이 그런다. "내일이면 또 전화 올 테니 밥 먹고 힘내서 체력을 비축해 둬 하하하" 세모눈을 뜨고 남편을 쳐다보니 조금은 미안한 시늉을 한다. 어려서부터 순간순간의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한 아이였다. 같은 일도 지금은 싫어도 이따가는 괜찮다 하고, 반대로 지금은 좋다 해놓고 나중은 또 별로라 하고, 그러니 사실 울고 불고 전화가 와도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는달까. 남편도 익히 알고 있으니 허투로 웃은 거겠지. 큰 아이와는 참 다른 성격이다. 한 아이는 필요 이상으로 신중하고 과묵한 돌솥 같은 반면 다른 아이는 앗! 뜨거워 앗! 차가워하는 냄비 같다. 장단점이 분명한 그릇이라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참 희한하게도 천양지차의 성격을 지닌 딸 둘 을 키우고 있다.


둘째 딸아이 인턴 생활 2주가 어찌어찌 지나가고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잘 버티고 있다. 아니 억울해서 날마다 도서관과 스터디 카페에서 열공으로 시간을 보낸단다. "태어나서 이렇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있었나 싶어"조금 전 전화 통화에서 허허허 웃으며 한 소리다. 왠지 넌 인생을 잘 끌고 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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