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고 사진처럼 또렷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이 있다. 대략 그런 것들은 혼자 있을 때면 불쑥 떠올라, 지금 눈앞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나를 이끈다.
일본식 주택이라 창문이 없어서 마치 동굴 같았던 할머니 집. 어린아이가 놀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던 도시 한복판. 4차선 도로와 매캐한 자동차 매연 그리고 주변 공장의 기름 냄새.
고모가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 낮에 TV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 김자옥을 보고, 기억에서 점차 흐려지는 엄마의 얼굴을 애써 떠올리며 잠들던 밤.
전학 가던 첫날.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흙먼지 내며 뛰어노는 아이들 사이에 혼자였던 나. 내게 꽂히는 낯선 친구들의 시선과 두려운 마음을 꾹 눌러 참아 내느라 뻐근했던 가슴 통증.
닫혀 있는 안방 문을 넘어 들려오는 통화 중인 아빠의 격앙된 목소리. 잠시 후 목격된 아빠의 통곡. 사업은 뭐고 망하는 건 뭔지, 현실적인 용어들 보다도 강하다고 믿었던 존재의 무너지는 모습이 더 혼란스럽고 무서운 어린아이.
지금은 기쁨도 행복도 희망도 느끼며 살지만, 바닷물이 다시 빗물이 되어 순환되는 자연의 이치처럼. 어디론가 흘러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 과거의 나_ 어린아이.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라고 외면하기엔 너무 가깝게 느껴지는 고독함.
나는 천천히 다가가 손을 잡고 나지막하게 말한다. 지금 여기의 내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너의 고독과 아픔을 똑같이 느끼며 가슴 한켠이 저릿하다고. 그래서 더 이상 넌 혼자가 아니라고. 지나온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소중한 조각이라고. 그러니 우리. 함께. 같이. 잘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