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3-3

by 흔한

네게 연락하는 게 몇 년 만인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도 까마득해. 적어도 3년은 넘었으려나? 한참은 연락이 없다 별안간 갑자기 편지라니, 당황하는 네 얼굴이 선히 보여. 아, 걱정은 하지 마. 구질구질한 미련이나 집착 같은 건 아니니까. 사실은 이미 좀 질려버렸거든.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거 있잖아. 마음을 주고도 돌려받지 못하는 비정이나, 줬으니 내놓으라는 겁박. 등장인물만 바뀐 채 똑같이 반복되는 진부한 스토리 같은 거.


사랑 이야긴 뻔하고 시시해.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들어. 특히 그 대상이 너라면. 그런 거 말고, 내가 쓰고 싶은 건 이런 거야. 언젠가 책을 읽는데 그런 말이 있더라구. 이별이란 상상 속의 너와 실재하는 너를 일치시키는 작업이라고. 널 완벽한 사람으로 추앙하려 날 한 없이 깎아내리거나, 널 가해자로 만들며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너와 나를 기억하는 일. 문득, 이렇게 글로 남기면 널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이건 너랑 이별하기 위해 쓰는 사랑 편지야.


시작은 어떤 게 좋으려나. 넌 우리 이야길 빠짐없이 알고 있는 까다로운 독자니까. 과거 이야긴 지루할테니 최근 내 일상을 적어볼까. 하지만 너무 낯설면 거리감 느낄 수 있으니 다소 진부한 일상 이야기로. 오늘 첫눈이 내렸어 - 그래, 이 정도가 좋겠네.


첫눈 내리는 밤. 명동 성당을 지나가는데, 교복 입은 애들이 가로등에 비친 눈을 올려다보고 있어. 연인인지 꼭 붙어 서 있는 모습이 퍽이나 다정해. 그들은 입을 살짝 벌려 우와, 낮게 속삭여. 몸을 덥히던 공기가 빠져나와 한 쌍의 하얀 입김이 되는 게 보여.


둘은 헌금함에 2천 원을 넣곤 기도초를 꺼내 조심히 불을 붙였어. 그러곤 기도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다시 눈 구경을 하더라. 불을 밝히며 무엇도 바라지 않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덩달아 가슴 속 촛불이 켜진 기분이야.


오늘 같은 날엔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때 이른 첫눈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많아. 그들도 어김없이 맑은 마음으로 감탄하고 있고. 난 첫눈 그 자체보다도 첫눈의 그런 속성을 좋아해. 하늘을 함께 바라보게 하는. 모두가 걸음을, 말을 멈추고 고개를 치켜든 광경. 그런 날이면 머릿속으로 누구를 떠올리더라도, 그 애는 뭘 하고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어. 분명히 너도 지금 첫눈을 보고 있을 테니까. 같은 것을 바라본다는 감각이, 흰 눈을 보며 내뱉는 와 하는 경탄이 우리를 이어주는 것 같아.


첫눈을 바라볼 때처럼, 너와 같은 생각을 하던 기적 같은 순간들이 있었어. 많은 사람 중 하필이면 네가 내 맞은편에 앉았을 때.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노래방에 가자고 할 때나, 막상 노래방에 도착하니 누군가의 열창엔 관심도 없다는 듯 몸을 살짝 내게로 돌릴 때.


이거 폰케이스 귀엽지 않아? 토끼 귀 부분 만지면 디게 말랑말랑해 - 지금 이 말은 쿵쾅대는 노랫소리에 숨겨 내게만 전하는 귓속말이라는 듯 목소리를 살짝 높여 말할 때. 고개를 돌리니 큰 눈 깜빡이며 휴대폰을 내밀 때. 토끼 귀를 꾹 눌러보고선 그러네 - 답하자 반달을 그리며 배시시 웃을 때.


돌아오는 주말, 너에게 첫 카톡을 받았을 때 - 말은 없고 사진으로만 왔을 때. 그 사진이 와인잔에 하얀 매직으로 그린 토끼 그림일 때. 와인 좋아하냐고 물어올 때, 친구랑 노는데 같이 술 마시자고 조를 때. 지금 8시인데 홍대까진 한 시간도 넘게 걸려, 완곡한 거절에도 대뜸 전화를 걸 때. 무조건 재밌을 거라고, 오늘을 놓치면 후회할 꺼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할 때.


술자리에서 내가 주량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을 때. 정신 차려보니 네 친구는 집에 가고 너와 둘이 남았을 때. 우리 집도 비슷한 방향이니까 너네 집 들렸다가 가면 되겠다, 내게 묻지 않고 택시를 잡을 때. 성신여대 입구에 내리는 날 따라 너도 내릴 때. 뭐지 생각하는 동안, 와 여긴 처음 와봐, 신기하다는 듯 둘러볼 때. 저기 금별맥주 있네? 금별맥주는 피자가 맛있어. 뻔뻔스레 말하며 가게 문을 열 때.


네 용기로 시작된 자리였으니 매듭은 내가 지어야겠다 생각했지만 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피자가 나오기도 전에 맥주부터 벌컥 들이켰잖아. 그러곤 네가 그랬지 아마. "첫 번째 두 번째 볼 때 좋았으니, 세 번째도 좋을 거야. 그치 않아?" 웃음이 나더라. 뭐가 그리 급할까 싶기도 했었고, 네 말이 상상치도 못했던 말이기도 해서.


네가 대단하다 생각했어. 내 승낙을 미래에서 듣고 온 사람처럼 자신감 있는 고백은 나로선 상상조차 못 할 대사였거든. 그래, 대사야. 지금 생각하면 대화가 아니라 정말 대사였던 것처럼 느껴져. 저랬던 때도 있었지 하고 꿈결처럼 아늑히 느껴지기도 하고. 극본 속 대사처럼 꼭 내가 반할만한 말을 골라서 하는 게 신기했어. 나는 네가 보여준 그 당당함이 좋았어. 나한테선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있잖아, 난 말야, 중요한 순간엔 언제나 포기해.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할 때 최선을 다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래서 그랬어. 네 마음에 답해야 하는 상황에 잠시 멈춘 건. 머뭇거리다 꺼낸 이야기는 가정사였어. 아버지의 거친 언사. 부모님은 이혼하고 갈라져 살고, 난 아직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건조하게 말했어. 나도 왜 그러는지 몰라.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가정사를 털어놓는 게. 그것이 나의 가장 나약한 속살이라 생각하는 건지. 그렇다고 한다면, 왜 가장 멋있어야 하는 순간에 약점을 청구서처럼 들이미는지. 이제와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야. 되돌아보면 항상 난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고 느껴지는데, 너에겐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네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꼬리 물고 뒤따른 내 말도 흐릿해. 다만 떠오르는 건 끝까지 자신감 넘치던 네 목소리. 거기엔 듣는 이의 기운을 북돋는 에너지 같은 게 있었어. 그 목소리에 반하고 말았어. 어찌 보면 나랑 정반대인 너를 좋아하게 된 건 당연한 거야. 사랑은 전혀 다른 이종의 존재에게서 발견되는 어렴풋한 가능성 같은 거니까. 난 널 좋아하면 나도 너처럼 당당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가능성을 발견했나 봐. 참 신기한 일이야. 나와 너의 그런 결정적 차이가 사랑을 잉태한다니 말야.


이후로도 너와 나의 차이를 계속 발견할 수 있었어. 넌 익숙한 곳을 편하게 생각했는데, 난 새로운 곳을 흥미롭게 여겼어. 데이트도, 맛집도, 카페도 전부 다. 넌 이미 친한 친구들과 친분을 쌓아가길 원했지만, 난 그 시간에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낯선 생각을 접하길 바랐어. 그게 교우건, 혹은 여행이나 예술을 통해서든.


넌 한 번 마음에 든 곳이 있으면 매번 거길 콕 집어 가자고 했어. 이를테면 용산의 양식집이나 서촌의 술집, 회기 근처 카페 같은 곳들. 처음 갈 때보다 두세 번 방문할 때 더 편안해 보였어. 아마 친숙한 공간이 제공하는 느슨한 느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 그런 곳에 있을 때면 넌 말에 진심을 한 움큼 더 넣어 말했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이나 너조차 알지 못했던 내심을 담아서. 그렇게 조용히, 때론 소리 내 웃으며 말하고 있으면 너에게서 매일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 네 이야기를 들으며 덩달아 나 역시 솔직해질 때가 있었고.


널 하루 하루 더 알아가는 감각이 날 일깨웠어. 처음엔 그저 밝은 여자 애. 몇 번의 만남 뒤엔 당차고 올곧은 사람. 나중에 네가 가진 우울이나 누구에게도 말 못한 고민을 말할 땐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바뀌는 옷차림과 껴안는 방식. 고민과 우울의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어투와 어조. 어디선가 길어온 재밌는 이야기와 너만의 독특한 관점. 너를 알면 알수록 더 알아가야 할 부분들이 보였어.


그런 상황이 이어지자, 너조차 온전히 모르면서 항상 새로운 것만 찾는 내가 우스워 보이더라. 새로운 교우나 여행 혹은 예술이, 나와는 다른 배경의 낯선 사람을 만나고 벽지에서 이국의 일상을 즐기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백 명을 아는 것보다 너를 빼곡히 아는 것이, 세계를 여행을 하는 것보다 네가 사는 동네의 내력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 세상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이란 걸 네게서 배웠어.


그렇게 하나씩 널 알아가던 어떤 날. 용산의 어둑한 술집에 들어갔어. 그날도 첫눈 내리던 날. 만남의 장소로 이곳을 고른 널 보며 하고픈 말이 있다는 걸 알았어. 여긴 힘들 때만 찾는 곳이니까. 투정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넌 자리에 앉아도 한동안 조용했어. 말하길 망설이는 널 마주하니 어딘가 어색하더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가 망설인다니. 그 태도 만으로도 네 비밀을 들어버린 것 같았어. 우리 사이에 하지 못할 말이 무엇일지는 셈하지 않아도 뻔하잖아.


요즘 네 반응이 평소보다 시시해졌단 사실이 생각났어. 그러고 보니 답장들이 이유 없이 더뎠던 것 같았고. 결별의 척력이 나를 한없이 밀어내는 게 느껴져 눈치가 보였어. 네 표정과 몸짓을 샅샅이 살피고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였어. 물건을 훔치지 않는 소매치기가 된 기분이었지. 그러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보챘어. 혹시 하고픈 말 있냐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넌 큐 사인받은 배우처럼 곧장 이별을 말했어. 그리곤 잔을 굴렸어. 와인이 잔 벽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데, 그 붉은 선을 따라 네 눈길도 같이 내려앉는 것 같았어.


단정히 내 대답을 기다리던 네가 기억나. 하지만 이별을 통보받은 소매치기가 이별을 통보하는 여배우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난 입을 닫아버렸지. 단지, 궁금했던 건 이별 사유였어. 침묵 속에서 한참 고민해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 몇 가지 짐작 가는 이유가 있었지만, 너무 사소해 그것이 아닌 전혀 다른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거든.


꽤나 길었던 침묵을 깨고 너에게 이유를 물었어. 이별의 이유는 전부 변명이라던데. 난 하찮은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어. 바짝 마른 내 얼굴에 이별 사유를 자비로운 비처럼 내려주길.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도 좋았고, 내 과오를 하나씩 나열한다거나, 아님 권태기라는 뻔한 핑계라도. 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나오질 않았어.


내가 맞이한 이별은 파도에 배가 전복되듯 갑작스레 온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었어. 바다에 풍덩 빠진 채 머리끝까지 슬픔에 잠겨 헤어날 수 없는 것. 분명 바람이거나 적어도 환승이야. 말 못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나쁜 년 - 차가운 물귀신이 되어 지나간 인연의 바짓가랑일 붙잡고 끌어내리는 것. 그러다 이불 푹 뒤집어쓰고 어푸 어푸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깊은 심해로 침잠하는 것.


그렇게 헤어진 뒤로 몇 번의 첫눈을 더 마주했어. 그럴 때면 미뤄둔 숙제처럼 너랑 헤어진 날이 떠올랐어.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하던 밤이 있었지. 내 죄가 보일 것도 같았고, 그냥 네가 나쁜 사람인 것도 같았어. 하지만 무엇도 분명치 않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게 선명히 다가오는 유일한 사실은 아직 내가 널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것뿐.


이렇게 이유 없이 떠날거면 애초에 시작하질 말지. 사랑을 송두리째 부정하기도 해봤어. 그러다, 뭐... 결국엔 이유 같은 건 포기했어.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일을 붙잡고 있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라구. 시간이 항체라도 되는지, 날이 갈수록 괜찮아지기도 했고. 그러다 오늘, 첫눈을 보는데, 다정한 연인을 보기 전까진 네 생각이 안 났어. 신기하더라. 원래라면 눈만 봐도 네가 생각났는데. 이젠 널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런 마음으로 소복이 눈 쌓인 명동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카페로 들어갔어. 그리곤 지금, 펜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해.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 짧은 만남의 끝에 날 기다리고 있던 건 공들여 만든 슬픔이었어. 흔한 동화처럼, 이 둘은 오래오래 행복했답니다, 끝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은 이야기와 바라는 대로 맺어지지 않은 인연. 이 글의 작가인 나도 바꿀 수 없는 새드앤딩.


감정이 다 지나간 지금은 슬픔이 되려 커다란 사랑의 반증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어. 그게 마지막인가 싶지 않을 정도의 사랑은 심심풀이 시간 죽이기도 못 되니까. 그리 보면 너무도 슬퍼했으니 우리의 결말은 오히려 완벽한 것이라 생각해. 이런 말들은 이별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으로 읽히려나? 하지만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야. 좋았던 것도 싫었던 것도 전부 너였으니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기도 해. 이별 사유는 알 수 없지만, 네가 날 떠나고 싶었다는 건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네가 날 좋아했던 게 변치 않는 진실인 것처럼. 그리보면 넌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걸로 충분한 것 같아. 넌 한 순간도 거짓으로 무마하거나 변명으로 넘어간 적 없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 이별을 지우려 만남까지 부정하지 않을게. 매 순간 진심으로 대해준 덕에, 난 너와 만나며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너와 헤어지며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됐어. 삶의 두께를 늘리는 이해와, 행복을 알기에 슬픔도 알 수 있다는 서글픈 진실이 나를 조금 더 완전하게 만들어. 네 덕에 나는 기쁘고도 슬플 줄 알고, 혹은 슬프고도 기쁠 줄 알아. 넌 나를 잊었겠지만 난 네 이별까지 품었으니, 이젠 내가 너보다 좀 더 가졌다고 생각해.


이렇게 편지를 마무리하곤 카페를 나섰어. 네게 이 글을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며 집까지 걸어갔어. 덕분에 눈이 머리부터 코트 소매까지 가득 쌓였지. 집에 들어가선 소매로 얼굴을 훔쳤어. 녹아내린 눈이 눈물처럼 번졌어. 코트를 탈탈 털며 너도 조금은 서글픈 하루이길 기도했어. 내일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지라도, 내가 널 진짜 떠나보낸 오늘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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