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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Jan 01. 2024

새해 새 아침, 나이가 든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



2024. 01.01

한 해가 시작되면서 떡국을 먹고 나이가 드는 건지 나이를 먹는 건지 모르겠지만 소년의 감수성도 청년의 치열함도 장년의 원숙함도 차츰차츰 사라지고 이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우기고 나이를 잊고 살아야 할 때가 돌아왔다.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의미가 한 살을 더 먹고 산다는 의미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쌓이고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넘어가서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은 것은 지나간 한 해의 미련 때문인지 다가 올 한 해에 대한 설렘보다는 나이를 먹는 두려움 때문인지 영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생동하는 운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이라면 나이를 까먹는다는 것은  경험과
아쉬움이 가득하고 늘어나는 완숙된  숙명이 우리를 이끄는 현상이다. 왜 기대와 희망이 경험과 아쉬움으로 치환되는 가에 대한 이해만 하여도 인생은 풍요로워지며 납득 가능하게 늙어가지  않을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라는 영화처럼 우리는 노인으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죽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해를 보내며 먹는 나이가 무조건 우리를 우상향 성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성숙이 원숙이 되고 원숙이 완숙이 되면서 어린아이로 돌아가 지구에서 한 생을 마감한다는 평범한 진리도 생로병사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남의 손에 의탁하고 세상의 물질에 취해 살다 보면 탁란에 속아 뻐꾸기 알을 품는 것도 모자라 부화된 뻐꾸기 새끼를 정성스레 벌레를 잡아 먹여 살리는 뱁새의 허망함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지구의 깊은 역사를 살펴보면 몇 가지 혁명적인 사건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우리 인류는 과학문명을 통해 발견해 내었다. 첫째 지구는 우주의 변방에 위치한 먼지보다도 미미한 존재라는 공간의 혁명이요 둘째 우리도 지구상의 많은 생명 중의 하나라는 다윈 이후 인간에 대한 혁명, 셋째 지질학 혁명을 통해 우리 지구가 아담 이후의 젊은 지구가 아니라 오래된 지구를 획득한 시간의 혁명을 통해 우리 인류는 우리의 운명과 숙명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문 앞에 다다랐다.

그러면 우리는 나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대략 50을 기점으로 우리 진아의 나이는 줄어든다. 즉 노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여 50살 즈음 완숙되다가 그 이후부터는 다시 진아의 나이는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른 살 먹은 아들이 있는 예순 살 나이를 먹은 아버지의 진아로서 나이는 100-60=40 마흔 살인 것이다. 이 부자간에 나이가 같아지는 때는 아들이 35세가 되는 5년 후 아버지도 100-65=35세가 되어 부자간의 진아의 나이가 동갑이 되고 이후부터는 아들은 진아 나이가  50이 될 때까지 늘어나고 아버지는 계속 줄어들어 아들이 쉰 살이 되는 해 아버지의 진아 나이는 스무 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진아 나이는 해가 갈수록 우상향 하는 것이 아니라 쉰 살까지 상승하다가 쉰 살을 기점으로 하강하는 포물선 구조를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천수를 다하면 백수 언저리에서 애기가 되어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니다가 해가 지나면  기저귀를 차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태아상태로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 생의 사이클을 생각하면 인생 후반전에서 맞이하는 한 해 한 해는 마냥 설레고 기대되는 한 해가 아니라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한 해 한 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생 전반전은 생동하는 운명이 지배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면 인생 후반전은 자숙하는 숙명을 겸허히 수용하는 한 해가 될 때 단순히 세상을 사는 인간이 아니라 때를 알고 시를 아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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