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5
호구지책이란 말이 익숙하던 때 직장은 우리와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즉 선택하는 영역이 아닌 선택되는 합목적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이 뿌리 깊은 세상의 원리는 우리가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 대상이 아니고 보다 효율적이며 편안하고 에너지 투입 대비 가성비가 높으냐 낮으냐가 그나마 우리 선택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 각자는 한분 한분 씩 생존경쟁이라는 들판에서 어느 한 분야를 맡아 세상을 돌리고 있다. 우리가 지나온 빈곤탈출의 시대에서의 직업 선택은 머리를 굴릴 필요도 굴려서도 안 되는 절체절명의 문제였다면 한세대를 거치면서 풍요로운 시대에 나고 자란 이들에게 이 가치관은 강요해서도 수용되지도 않는 폭력과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지금 심각하게 걱정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각 나라가 담당하고 있는 공급망의 사슬 안에는 자원과 중간재 같은 부품과 물자도 있지만 빈곤과 풍요가 서로 얽혀있는 개도국과 선진국 간의 타임머신과도 같은 인력 공급망도 글로벌 공급망의 한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적교류의 네트워크 안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우리의 선택권은 공간을 선택해서 가는 자유가 주어질 따름이다. 한 세 대전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열사의 땅 중동으로 달려갔듯이 지금 동남아의 젊은이들은 필사적으로 한국어를 배워서 우리 MZ세대가 기피하는 일자리를 향해 기회의 땅 코리아로 오고 있다.
이러한 물결이 우리 세대에서는 지방과 서울 간에 일어났고 그 와중에 기회를 잡은 우리 세대의 대다수는 수천 년 이어온 척박한 가난을 박차고 농촌을 탈출하여 수도 서울시민으로서 당당히 입성하여 공간 선택에 성공한 한 분이 되어 이제는 돌아가야 할 고향을 잃어버린 체 미래를 걱정하는 풍요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빈곤의 탈출은 공간의 이동을 가져오고 이동된 공간에서 풍요를 맛본 우리는 그 자리를 빈곤에서 탈출하려는 자에게 물려주는 대서사가 우리의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름대로 풍요의 한 지점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인생 후반전은 빈곤의 탈출 앞에 섰던 인생 전반전 보다 한 차원 높은 입장료를 요구한다. 무엇보다 눈높이가 높아져 웬만해서는 만족도 못하고 전반전을 살았던 경험을 앞세워 후반전도 똑같은 줄 알고 사사건건 오판을 하고도 고칠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귀 닫고 눈 닫는 사오정이 되어가는 것이다. 먼저 인생 후반전에 대한 우리의 기대 수준을 많이 낮추어야 한다 기대는 실망을 불러오므로 소박하고 하심된 몸뚱이로 하루살이 같이 하루하루 느끼고 제 발로 걸어 다니는 목표가 지속가능한 희망 아닐까?
그러나 이 소박한 목표가 어쩌면 우리가 지구에 온 진정한 의미 인지도 모르겠다. 지구를 두 발로 딛고 걸어가 지구라는 행성을 오감으로 느끼는 일 그것이 인생 전반전의 세상을 돌리던 한분에서 인생 후반전의 자신의 true color를 그대로 드러내는 한 사람으로 탈바꿈되는 전, 후반전 인생 대서사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