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9
설악은 5월이 되어도 산봉우리에 잔설을 간직하고 있어 설악이라 불리는 걸까?
피 끓는 청춘의 시간을 국가에 맡기고 군대 가는 길은 서울 강남 뉴코아백화점 광장을 시작으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1월의 눈발이 차창을 때리며 달리는 경춘가도의 설경은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 같았다. 춘천 에티오피아 호반을 거쳐 소양강변을 내달린 입영버스가 당도한 내설악은 차분한 겨울산의 고즈넉함으로 앞으로 닥칠 저승과도 같을 군생활을 위로해 주는 듯 무심히 우리를 맞이하고 진부령을 넘어 굽이굽이 돌아 돌아 국토의 최북단 간성 신병교육대로 장정들을 토해내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교대 생활은 고된 훈련과 추위 그리고 폭설과 싸워야 했다.
1미터가 넘어가는 적설은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면 한길을 넘기 십상이고 새벽에 기상하면 신교대 내무반 현관문을 폭설이 막아서는 경우도 허다했고 훈련병들은 전투 제설에 총력전을 다 해야 했다.
그렇게 바라본 설악산 사이로 끝도 없이 내리는 눈은 이승의 낭만이 아니고 저승에서 형벌로 가해지는 지난한 노역임이 확실해질 무렵 일사불란한 전투제설의 기적은 한길의 눈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가르고 치워 훈련이 가능한 연병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겨울산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즈넉함을 빼고는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산은 들기가 어렵다는 말처럼 겨울산에 들어가기 전 산은 쉬이 우리를 반기지 않는다. 일진광풍을 동반한 심술궂은 모습으로 일단 물러가라 경고한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만나듯 난관을 뚫고 산중으로 들어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고즈넉하고 하얀 속살을 그대로 들어내며 우리를 받아들인다.
하얀 설악 그리고 웅장하게 솟은 울산바위 울산바위를 시작으로 짙푸른 동해바다까지 그대로 내달리는 녹사평 구릉은 철책으로 가로막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금강산 자락이 동해에 닿는 해금강의 절경을 가로질러 원산만까지 내달리는 명사십리 못지않은 남한 최고의 절경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관성적 존재인 우리 인간은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 지금 내가 있는 장소와 관계가 소중한 것이다. 인연이란 인위적으로 한번 맺기도 자르기도 어렵지만 시간이라는 압력이 우리를 밀어내면 삼라만상이 희미해지면서 우리 눈앞에서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찰나적 삶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자발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지구를 알아나가고 혹여 저승에 가서 어디서 왔는가 누가 물어보면 이승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삶의 기억을 우리 정신에 심어둘 수 만 있다면 그래도 알찬 삶을 살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우리의 초록별 지구에서의 삶이 생존을 넘어 추구했던 온갖 욕망으로 얼룩진 추상적 물건이나 이념으로 우리 정신을 오염한다면 그 사람의 생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미생의 삶으로 끝마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여기서 저기로 가는 여정이 우리의 한 생이고 삶이라고 한다면 비록 시간이라는 압력에 떠밀려 공간을 살다가는 인간이지만 우물쭈물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면서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와도 자갈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심정으로 삶에 삼매 한다면 5월에도 녹지 않는 설악 정상의 잔설같이 반짝반짝거리는 명사십리 모래사장 같이 깊고 푸른 동해바다의 광활함을 뚫고 세상을 밝혀주는 동해바다의 일출같이 환한 마음으로 한 세상 여한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